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석 Feb 07. 2022

남매의 여름밤

어린 시절 좋아했던 햇빛을 보았다.


국민학교 2학년 때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학교에 다녀왔더니 아버지께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오랫동안 아프셨던 건 알았지만 어제저녁까지 봤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가까이에 있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던 어린 나는 슬픔의 감정을 알아채기 힘들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집 뒷문으로 가는 좁은 통로를 지나는데 갑자기 슬픔이 쏟아졌다. 조금 늦은 시차로 온 슬픔은 멈출 줄 몰랐다. 몇 미터 되지 않은 짧은 통로에 갇혀 한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할머니의 죽음은 나를 잠시 현실로부터 떨어뜨려 놓았다. 그렇게 목 놓아 울고서 아버지 따라서 상주를 했다. 상주를 한 건 아버지의 얘기를 통해 들어서 안 거였지 사실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집에서 며칠간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는 기억 밖에.


어린 시절 가난했고  좋은 일도 많았지만 나름 좋은 추억들도 있었다. 아니 이건 내가  남매  막내라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큰누나는 장녀라고 작은누나는 둘째라고 그리고 딸이라서 책임져야 하는 무언의 책임감 같은  있었을 텐데  막내고 아들이라 조금은 자유했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  안에 혼자 있는 시간보다는 모르는 길을 걷는  좋아했다. 그림자가 길게 드리우진 오후 햇살을 좋아했다.  여름의 뜨겁고 밝은 빛을 좋아했고 자전거 타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시절 기억  가장 좋았시간을 꼽으라면  가지가 있는데 먼저 자전거를 빼놓을  없다.


자전거를 참 좋아했다. 세 발 자전거를 탈 때부터 이후 두 발 자전거를 탈 때도 자전거를 타면 어디든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어서 참 좋았다. 5학년 때 서울로 이사 온 후 방학 때 가끔 친척 고모할머니 댁이 있는 고향 목포에 내려가면 꼭 자전거를 빌렸다. 천 원이면 한 시간을 빌려 탈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유달산에 올라 굽은 길을 페달도 굴리지 않고 쭉 내려갈 때면 구름이 꼭 나랑 같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느낌이 좋아 유달산을 꼭 갔다. 그렇게 자전거를 타고 목포항까지 가서 한 바퀴 돌고 오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혼자 골목골목을 걸으며 보았던 생소한 길과 담장, 햇살이 참 좋았다. 이 골목을 꺾어 나가면 무슨 길이 나올까. 저 길을 지나면 내가 생각한 길과 만날까. 그렇게 걷는 시간이 좋아서 낮에도 새벽에도 길을 나섰다. 할머니 댁에서 삼촌과 잠을 자다가 가끔 새벽에 길을 걷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면 대문을 열고 길을 걷는다. 아무도 없는 새벽은 꼭 영화 세트장 같았다. 낮에 보이던 사람들도 시끄럽던 소리도 달리던 차도 없는 새벽. 그 새벽에 걷는 시간은 내게 보물 같은 시간이었다. 그렇게 멀리 돌고 와 다시 잠을 잤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우리 집의 가세는 더욱 기울었다.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집으로 이사를 갔다. 아버지는 곧 서울로 올라가시고 큰누나도 얼마 안 있다가 서울로 갔다. 목포에서 먹고살기 힘들다고 생각한 우리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와 작은누나, 내가 목포에 남았다. 그때가 국민학교 3학년~4학년 때였다. 학교에 다녀오면 거의 늘 혼자였다. 다니던 국민학교가 꽤 멀었다. 그래도 걷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 시간이 지루하지 않았다. 길을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편지, 하숙생, 등대지기, 희나리,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를 가장 많이 불렀던 것 같다. 하숙생은 아버지 18번이라 하도 많이 들어서 흥얼거렸고 편지를 참 좋아했던 것 같다. 그리고 가끔 노래도 만들어 불렀다. 혼자서 하교하는 그 시간이 외로우면서도 좋았다. 끝없는 상상을 했었다.



어제 새벽에 영화 '남매의 여름밤'을 봤다. 영화가 나올 때부터 보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어 못 보다가 이제야 왓챠에서 봤다. 주인공 남매에게 언젠가 추억이 될 기억을 몰래 훔쳐본 느낌이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났다. 자전거와 햇살, 할머니, 옛날 집, 고요한 여름 낮, 여름 소리.

문득문득 나오는 여름 풍경과 하늘은 그 아이들에게 어떻게 기억이 될까. 그 시절 그 감정을 어떻게 담아둘까. '남매의 여름밤'을 보면서 누나와 지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여름밤 바깥 화장실 옥상 위에 있는 평상에 이불 깔고 누워 누나들과 이선희 노래를 메들리로 신나게 부르다가 새벽 이슬이 차가워 다시 부랴부랴 내려갔던 일도 있었다. 그렇게 노래를 부르다 보면 나중에 꼭 가수가 돼야지 생각하다가도 자전거를 탈 때면 나중에 꼭 사이클 선수가 돼야지 했던 꿈 많던 시절. 영화 속 남매도 일상을 살아가지만 어떤 꿈을 꾸고 살아가고 있었을까.


영화에서 남매는 어린 남매뿐만 아니었다. 아버지와 고모도 남매였다. 어린 시절 남매와 성인이 된 남매. 분명 같은 시간과 시절을 살아가는데 어린 남매에게는 그 여름이 참 아름다웠고 아버지와 고모는 그 여름이 또 견뎌내야 할 계절 속 삶이었다. 할아버지가 생일날 늦은 새벽에 거실에 혼자 앉아 노래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신중현의 '미련'이다. 사실 이 노래를 여기서 처음 들어봤다. 그리고 나중에 찾아보니 신중현이 1972년에 발표한 노래다. 중간에 다른 버전의 '미련'이 나오고 엔딩 크레딧에 또 다른 버전의 '미련'이 나온다. 노래가 장면마다 참 어울렸다. 영화가 노래 한 곡에 다 담겼다.



아들 둘이 있다. 이제 고 3이 되는 아들과 중 2가 되는 아들. 이 녀석들에게 이 계절, 이 시간이 어떻게 기억될까. 시간은 지나고 보면 참 빠르다. 그렇게 더디던 그날의 시간은 이제 갈 수도 볼 수도 없는 찰나가 됐다. 그래서 오늘이 참 소중하다. 2월 7일 새벽 3시. 이 시간이 소중하다. 싫든 좋든 나중에 추억으로 남을 이 시간이 참 소중하다.



#남매의여름밤

작가의 이전글 시원한 바람 부는 저녁산책을 가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