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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May 05. 2018

배를 타고 온 라푼젤

그녀가 넘버 투 냉장고에 숨겨놓은 것들


북한의 김일성이 뿔 달린 괴물이 아니라는 사실은 물론 오래 전에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손이 휴전선을 넘어와 남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건 여전히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시시각각 업데이트되는 연관 기사들을 자꾸만 기웃거렸다.


정상 간의 만남이라는 연관 주제 안에서 줄줄이 이어진 온라인 기사들 사이를 헤엄쳐 다니다가 프랑스 대통령 내외가 미국을 방문해 찍은 사진 기사들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양국 영부인의 의상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넓은 챙 모자를 의상과 같은 색으로 맞춰 쓴 미국 영부인도, 곧은 각선미를 뽐낼 수 있는 미니스커트로 과감하게 스타일링하는 프랑스 영부인도, 막상막하 패션 고수다. 점잖게 입어야 하는 정서가 반영된 아시아 영부인들의 옷차림과 비교하면 대담하고 이채롭다.


하기야 두 영부인들의 생 자체가 범상치 않은데 하물며 의상에서의 과감성쯤이야. 최근 들어 세상 돌아가는 걸 보고 있으면 ‘파격’이라는 것이 시대와 만났을 때 발생하는 현상에 대해 새로이 눈을 뜨게 된다. 아울러 트럼프가 힐러리 클린턴을 누르고 당선되던 순간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그날 아침, 믿을 수 없는 대선 결과에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젓던 나. 미국인들은 제 정신이 아닌 게야!  


그러나 트럼프의 즉흥적 파격성이 예측한 바와는 다르게 내 모국의 안보에 긍정적 영향을 미치게 되자 마음이 복잡해진다. 거기다 더해, 재는 것 많고 신중한 지성파가 대통령을 했더라도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고심의 시간이 긴 유형의 정치가가 김정은의 저돌적 배짱 게임에 맞상대를 해주었을까를 고민해보면 긍정의 답을 내는데 자신이 없어진다.


이런저런 생각과 함께 양국의 영부인들 사진들을 보고 있으려니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브누아 부부는 현재 어떤 심경일까? 마땅치 않아했던 마크롱이 프랑스의 대통령이 된 지 일주년이 되어가는 지금, 예상대로다 싶을까, 혹은 생각보다 만족스럽다 싶을까?


작년 이맘때였다. M은 즉석에서 반죽한 와플을 구워내랴, 주스 기계로 연달아 오렌지 즙을 짜내랴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시부모님을 상대하는 역할을 내게 떠넘기고 요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걸 즐기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M은 베트남계 미국인으로 영어밖에 할 줄 몰랐고, M의 프랑스인 시부모님인 브느와 부부는 영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브느와 부부가 미국에 사는 아들네 집을 방문할 때마다 M은 열과 성을 다해 시부모님을 대접하지만, 시집 식구 상대하기가 녹록치 않기는 지구촌 어디나 마찬가지인지 좀 힘들어했다. 횟수는 대략 일 년에 두 번 정도 되는 것 같은데 한 번 오시면 삼 주는 머물다 가신다고 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이중고였다.


결국 M이 남편에게 항의해 방문 회수를 일 년에 한번으로 줄이고 한 번 오시면 보름 정도만 계시는 걸로 시부모님을 설득했다고 들었다. 브느와 부부는 마지못해 아들 내외의 제안을 받아들이긴 했는데 일 년에 한 번이라는 횟수를 이런 저런 핑계로 어겼다. 손자의 세례식에 참석해야 한다는 이유로, 유치원에 다니는 손녀와의 전화 통화 중 전해들은 ‘할머니의 날’을 모른 척 할 순 없다는 등의 이유로 걸핏하면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날아왔다.


작년의 그날 역시, 대략 비슷한 사연으로 아들네 집에 와있던 브느와 부부가 프랑스로 돌아갈 날을 앞둔 이틀 전이었다. 나는 프랑스에 체류한 경험이 있어 브느와 부부가 미국에 올 때마다 M의 초대를 받아 그 집에서 식사를 함께 하곤 했는데, 그날도 M은 내가 자기 집에 도착하자마자 구원받았다는 눈짓을 보내고는 주방으로 도망가 음식 준비에 집중하는 것으로 신경을 분산했다.


보아하니 고부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한 판의 신경전 후 중재자 겸 해서 나를 부른 거였다. 시어머니와 기분은 풀어야겠는데 자기 혼자서는 역부족이라 내가 껴서 함께 식사를 하고 나면 그럭저럭 분위기가 매끄러워질 거라는 계산이었다. 솔직히 남의 시부모님까지 상대해야 하는 역할이 항상 달가울 순 없지만 친구인 M도 도와줄 겸, 불어 연습도 할 겸 브느와 부부와 반갑게 인사하고 식탁에 앉았다.


사실 시부모와 며느리라는 틀만 벗어나면 브느와 부부도 대화하기에 불편하지는 않은 분들이었다. 나는 불어 회화 연습 기회가 생긴 거고, 그분들도 나를 보면 그들의 모국어로 대화할 상대를 만났다는 이유로 반색하니 나쁠 것 없었다. 브느와 씨는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 줄 아는 호인이고, 브느와 부인도 ‘며느리가 아닌’ 내게는 더없이 상냥했다.


우리는 M이 차려주는 음식을 먹고 마시며 여러 가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브느와 부부가 사는 고장이 베르당 전투의 격전지였던 터라 돌아볼 유적지가 많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프랑스인들과 미국인들의 육아 방식 차이점을 설파하면서는 며느리 들으라는 듯 뼈있는 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디저트를 곁들여 차를 마시게 되자, 마들렌을 홍차에 적셔먹다가 기억의 여행을 떠나게 되는 프루스트의 소설로 화제가 옮겨 가는 바람에 내가 쓰고 있던 소설에 대해서도 왈가왈부하게도 됐다.


문제의 대선 관련 화제는, 브느와 부부의 귀국 비행 시각을 언급하다가 나왔다. 브느와 부인은 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이틀 후 꼭 귀국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대선 투표를 놓쳐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저녁 식탁에서 정치를 논하지 말라’는 철칙을 지키고 사는 미국인들이었다면 나도 물어볼 생각을 안 했겠지만 정치적 신념을 내비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프랑스인들이었던지라 슬쩍 찔러 봤다. 특별히 지지하는 후보가 있느냐고. 브느와 부인은 기다렸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당연히 르펭이죠! 자국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고, 점점 수가 늘어나는 무슬림 유권자들 비위 맞추는 것에만 급급한 정치인들 때문에 나라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어요. 그래서 르펭이 정권 잡아야 하는 거예요! 자칫하면 프랑스 여자들 전체가 히잡 쓰고 다니게 생겼다니까! 프랑스는 프랑스다워야지, 안 그래요?”


요는 프랑스 사회의 하층 계급을 이루고 있는 무슬림과 이민자들을 압박할 정책을 펼 보수가 답이라는 거였다. 프랑스의 다음 정권이 어떤 정책을 펴든 나와는 별 상관이 없지만, ‘백인우월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르펭을 곱게 보고 있지는 않은 터였다. 눈치 빠른 브느와 씨가 아내의 말을 받아 부연 설명을 했다.


“오해가 생길까봐 하는 말인데, 확실히 해둘 건 우리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라는 거예요. 프랑스인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이라면 현재 프랑스에서 그토록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 수는 없지 않겠어요? 다만, 프랑스는 프랑스다워야 한다는 거죠. 우리의 언어, 우리의 전통과 문화가 버젓이 있는데 그걸 지키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무슬림들은 프랑스를 무슬림의 나라로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좌파 정권이 점점 늘어나는 무슬림 유권자들을 의식해 그들을 위한 공약을 마구 남발해대니 프랑스의 뿌리가 흔들리는 거라고요. 이미 파리는 뭐…….”


브느와 씨는 어이없어할 때 짓는 프랑스인 특유의 인중 당기기 표정과 함께 고개를 젓고는 나의 동조를 끌어내고자 했다. 르펭에 관한 호불호는 별개로 하고, 언어와 문화를 사수하고자 하는 프랑스인들의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나라도 그럴 것 같기는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문제에 시선을 줄때마다 별 수 없이 짚고 가게 되는 생각이 있다. 미국의 흑인 노예 제도가 현세까지도 풀지 못하는 인종 간의 갈등을 초래했듯이, 프랑스의 무슬림 문제는 그들의 식민사가 만들어낸 그늘이라는 사실. 입 밖에 내지 않은 내 생각을 읽은 것일까. 브느와 씨가 민첩하게 대응했다.


“물론 알아요. 그러게 왜 남의 나라들을 식민했느냐고 따지는 의견들도 있죠. 하지만 그때는 시대가 그랬어요. 지구촌의 흐름이 그랬다고요. 그리고 사실 우리 프랑스가 그 나라들에 좋은 일 한 것도 많거든요. 병원도 짓고, 학교도 짓고, 얼마나 많은 선진 인프라를 구축해줬는데요.”


가급적 객관적으로, 순순하게 브느와 부부의 입장을 이해하려는 내 의식에 덜컥, 하고 제동이 걸리는 순간이었다. 우리에게 가깝고도 먼 나라 쪽 일부 인사들이 가끔씩 내뱉어 한국인들을 들쑤셔 놓는 궤변과 매우 흡사한 발언이었으니까. 해박한 브느와 씨가 내 국적과 동아시아 역사에 대해 잠깐 잊었나 싶어서 돌려 말해보기로 했다.


“음…… 일본 사람들이 한국과 관련된 식민사에 대해 발언할 때 그런 식의 해석으로 접근한다고 듣기는 했어요. 그때마다 한국에서는 난리가 나곤 하죠.”


브느와 씨는 정신이 드는 모양인지 얼굴색을 바꿨다. ‘아차, 얘가 한국 사람이었지 참.’ 대충 이런 자각이 깃든 표정이었다. 브느와 씨가 미국인이었다면, 혹은 미국화 되어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럴 때 다음과 같이 대처했을 거라고 본다. ‘아, 그렇겠군요. 입장이 서로 다르다보니 아무래도.’ 하면서 대화의 꼬리를 자른다거나, 그저 머쓱하게 웃고는 화제를 돌리는 식으로. 하지만 브느와씨는 프랑스인이므로 물러서지 않았다.


“알아요. 당신 입장에서는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거. 그러나 그 당시의 세계정세에서 흘렀던 물결을 보면…….”


당시 유럽의 경제 위기와 국가 간 갈등이 어떤 식으로 식민사관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이끌어냈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브느와 씨의 담론을 한동안 듣고만 있어야 했다. 수평적 태도로 반박하지 못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토론과 논쟁을 훈련받으며 자라지 못했고, 내 부모와 같은 연배인 어른에게 대들기가 어려웠고, 직장과 얽혀있는 M과 나의 관계도 신경 쓰였고, 나보다는 그 시대와 가깝게 살았던 세대가 경험 지식을 토대로 하는 주장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나라를 식민화 하는 것으로 이득을 취하고자 했던 자국의 과거 입장을 대변해 입씨름을 하려는 사람과 대면해 보는 경험 자체가 처음이었다. 덧붙이자면, 현재 채석 사업을 하고 있는 브느와 씨의 이전 직업은 변호사였고, 브느와 씨에겐 모국어이고 내게는 제 삼의 언어인 불어로 논쟁하는 상황 자체가 애당초 불공평한 세팅 아닌가.


흡사 강연을 하듯 현란한 언변으로 무장된 브느와 씨의 주장을 입을 다문 채 듣고는 있었지만 불편한 심기가 노출되는 건 당연했다. 문득 조용해지는가 싶더니 브느와 씨가 흥분기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아,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했나?”


브느와 씨도 나도 희미하게 접대성 미소를 띠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기는 했지만, 나는 이미 기분이 상할 대로 상해 있는 데다 굳이 그걸 감추고 싶지도 않았다. 성질대로라면 요샛말을 빌려와 ‘X소리를 참 정성스럽게도 하시네요.’ 라고 쏘아 붙여야 마땅하겠으나 밀리는 입담을 속된 말로 대리 무장해 덤벼들 만큼 무모하지는 않은 지라 간신히 한 마디 했다.


“아뇨 뭐…… 흥미로운 발상이네요. 상대편 입장에서는 그런 식으로 접근하기도 하는군요.”

 

피차 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아진 상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란 신경을 돌리는 것밖에 없다. 쓰다 남은 음식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있는 M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창고형 마켓에서 쇼핑하기를 좋아하는 M. 활짝 열린 최고급 냉장고는 늘 그렇듯 꽉꽉 채워져 있었다. 그 많은 음식 재료들 중 간장이나 베트남 피시소스 같은 양념은 하나도 없다. 이른바 ‘냄새가 강한’ 음식 재료들은 남편이 질색을 하기 때문에 M은 주 공간과 분리된 지하에 냉장고를 하나 더 들여놓고 그 안에 그것들을 다 모아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M이 냉장고 안에서 알록달록한 과자가 담긴 용기를 꺼내들어 보였다. 브느와 부부가 프랑스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 과자를 제일 잘 만들기로 유명한 제과점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마카롱 먹을래?”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케잌 한 조각을 먹은 데다 일어날 때가 되었다 싶기도 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브느와 부부와 작별 인사를 하고는 집을 나서는데 M이 현관 바깥까지 따라 나와 손가락 두 개를 펴보였다. 이틀만 참으면 해방이라는 의미였다. 그러고는 물었다.


“옆 동네에 새로 생긴 딤섬 집 얘기 들었어? 맛있대. 시부모님 가시고 나면 같이 가서 점심 먹자. 다음 주 어때?”


불과 며칠 새에 같은 사람과 또 약속을 만든다는 게 내키지 않아 핑계거리를 궁리하고 있는데 M이 조르는 표정을 지었다.


“나 딤섬 진짜 좋아하는데 필립은 아시아 음식 별로 안 좋아해서 가려고 안 할 거란 말이야. 같이 가자, 응?”


차를 세워둔 곳으로 걸어가는데 입맛이 썼다. M은 브느와 씨와 내가 한 대화를 들었을까? 못 들었겠지? 들었다면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나라 출신으로 저리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을 순 없겠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다보니 냉장고 하나 제 마음대로 못 쓰고 사는 M한테 공연히 화가 나기까지 했다. 딤섬을 먹으러 가는 게 내키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그 때문이었는지도 몰랐다.


차안에 들어와 앉아 시동을 걸려는데 문득 힐러리와 트럼프가 서로를 공격하며 선거 운동에 열을 올리고 있던 시기에 M에게서 의외의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던 일화가 떠올랐다. 남미 출신 불법이민자들이 더는 넘어오지 못하게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세운다는 공약도, 시리아 난민을 미국에 들이는 것에 강경책을 쓰겠다는 공약도, 자국민을 보호한다는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정책이라며 트럼프를 지지한다는 말을 해서 듣고 있던 친구들을 놀라게 했던 M.


그때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 모두가 아연실색해 M을 쳐다봤었다. 현재 미국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는 M의 가족들이 미국에 정착하게 된 경위를 적어도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은 다 알고 있었으니까. 친미 인사라는 이유로 목숨이 위태로웠던 M의 아버지는 베트남전이 터지자 가족을 이끌고 비밀리에 나라를 탈출한 보트피플 1호였다.


차를 몰고 M의 차고 앞 진입로를 따라 도로로 내려왔더니 M의 딸이 거실 창에 얼굴을 붙인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지대가 높은 곳에 지어놓은 M의 집에서 도로까지의 거리가 꽤 되어 경사진 잔디 마당이 한없이 드높고 넓어보였다. 난민 신세가 되어 미국에 들어왔던 제 엄마의 어린 시절에 비하면 그야말로 공주처럼 자라는 예쁜 아이였다.


저택에 가까운 집, 최고급 사립학교, 미국과 프랑스를 밥 먹듯 오가며 시시때때로 프랑스인 할머니 할아버지의 선물 공세를 받고 자라는 아이. 영어와 불어는 자유자재로 하지만 베트남어는 몰라 외할머니와는 소통이 잘 되지 않는 아이. 아이에게 손을 흔들어주곤 뇌까렸다.


'그래. 남들이 하는 말이 맞아. 난 생각이 너무 많아.'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그 사이 브느와 부부가 미국에 또 한 번 왔었다는 얘기는 들었고, 그때도 M이 자리를 만들고 싶어 했지만 핑계를 대고 피했다. 그래도 마크롱 대통령의 정치 행보는 주의 깊게 살펴봐놓아야겠다. 어쩔 수없이 브느와 부부를 또 만나게 될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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