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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예진 Nov 28. 2018

에스프레소 타임머신

맛이 불러낸 기억


프랑스에서 유학하던 시절, 커피라면 으레 에스프레소였다. 불어로는 엑스프레스라 불리는. 처음부터 그 독한 커피가 좋았던 건 아니었다. 난생 처음 유럽 땅을 딛고 마셔 본 에스프레소는 맛이 지나치게 강해 혀가 타버리는 줄 알았는데, 음료라기엔 양도 너무 적고 걸쭉하기만 한 그 커피에 인이 배겨버린 이유는 순전히 유학생의 빈곤 때문이었다.


당시 파리 시내 카페에서 파는 에스프레소 가격은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주문했을 때가 천오백 원 정도, 바에 서서 마실 경우 반값인 칠,팔백원 정도였다. 언감생심 우유가 들어간 카페오레나 카푸치노라도 넘볼라치면 삼사천 원 정도에 육박하는 가격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러니 취향과는 상관없이 내 선택은 늘 에스프레소였다. 혼자일 경우에는 주로 바에 서서 마셨다.


주머니가 가벼운 학생들이야 그렇다 쳐도, 카페인이 절실해 보이는 얼굴로 카페로 들어선 이들 대부분이 마시는 커피도 대개 그것이었던 걸 보면 꼭 가격 때문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한국인에게 밥이란 간을 하지 않은 밥이 진리인 것처럼, 그들에게 있어서 커피란 단순하게 농축된 에스프레소여야 제격인 모양.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집에서 마시는 커피는 달랐다.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신다 해도, 비싼 에스프레소 기계를 집집마다 가지고 있을 리는 없어서 대부분의 경우 일반적인 드립 형 커피메이커를 쓰고 있었다. 카페에서는 갓난아기 주먹만 한 잔에다 커피를 마시던 사람들이 집에서는 국그릇처럼 큰 대접에다 진하게 내린 커피를 가득 붓고는, 우유를 섞어 두 손으로 들고 마신다. 그게 카페올레였다. 여기에다 누텔라나 버터, 잼 같은 것을 바른 바게트, 아니면 크루아상을 곁들이는 게 프랑스인들의 일반적인 아침 식사라나. (간식 아니고?)


어학연수를 위해 프랑스의 한 지방도시에서 하숙을 하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첫날 하숙집 주인아주머니는 아침으로 뭘 먹고 싶으냐고 물었다. 서양식 아침 식사라고는 미국식 밖에 몰랐던 나는 계란, 토스트, 커피, 과일 등을 언급했다. 음료로는 오렌지 주스나 커피 중 어떤 걸 원하는지, 빵은 바게트를 원하는지 크루아상을 원하는지를 묻는 질문에 만찬을 요구해버린 것이다. 아주머니의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라니!


후에 거처를 파리로 옮기고, 몇 년이 지나 졸업을 할 무렵이 되자 만찬은커녕 제대로 아침을 챙겨먹을 시간적, 정신적 여유도 없었다. 뭔 짐은 그렇게 많았었는지. 백팩에, 간밤의 과제였던 스케치 포트폴리오에, 화구들까지 잔뜩 싸 짊어지고 학교 앞 지하철역 바깥으로 나오면 일단 카페로 들어가는 것이 내 일과의 시작이었다. 바 앞쪽 바닥에 짐을 내려놓고, 매일 간 덕에 얼굴을 익히게 된 바텐더 할아버지와 눈인사를 나누고 나서 주문하는 건 늘 똑같은 거였다.


“커피 주세요. 크로아상 하나랑 같이요.”


가끔은 에스프레소, 크루아상, 오렌지주스로 구성된 아침식사 세트가 그날의 스페셜로 뜰 때가 있는데, 그럴 땐 몇 프랑을 더 쓰더라도 꼭 그걸로 사먹었다. 카페인과 탄수화물로 간신히 불을 켜놓은 몸에 가끔씩이라도 비타민을 부어주는 파격, 그 소박한 사치마저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치이이익 김을 빼는 반 수동 에스프레소 머신의 요란한 소음, 프랑스 카페들이 으레 그렇듯 백 년 전에도 그대로였을 실내 장식, 곳곳에서 웅성대는 사람들 소리, 바 끝에다 팔꿈치를 기댄 채 지금까지도 기억나는 역한 냄새의 골루아즈 연기를 뿜어대며 조간을 훑는 베레모 아저씨들.


그 풍경 속에서 막 뽑아낸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넘기노라면 잠깐이나마 내가 이방인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엉성한 불어로 프리젠테이션을 해야 하는 초조함도, 외로움을 짙게 만들곤 했던 파리의 축축한 회색 공기도 견딜만한 것으로 여겨지면서 나 역시 그 배경을 이루는 파리지엔느가 된 것만 같았다. 유럽의 도시에 드리워진 음울한 공기 속에서, 검고 짙은 소량의 액체는 그렇게 매일 매일 천천히 내 혀끝을 길들여 갔다.


졸업을 하고 귀국을 했더니 한국에는 스타벅스가 막 상륙한 참이었다. 그때까지도 한국에서는 에스프레소를 찾는 이가 극히 드물었을 뿐더러 대중들은 미국 영화 등을 통해 미리 눈도장 찍은 스타벅스 커피에 입맛을 맞춰가기 시작하던 시점이었다. 당시 제일 ‘핫’하다는 청담동의 카페들에서는 고급 커피 잔과 쟁반 등을 동원해 눈요기 용 커피를 서빙하면서 무려 만원에 가까운 가격을 매기고 있을 때니, 커피 맛이 좋건 나쁘건 스타벅스는 이미 가격대면에서 대중 친화적 요인을 갖춘 셈이었다.


스타벅스를 필두로 미국의 테이크아웃 커피 브랜드들이 경쟁적으로 한국으로 들어왔고, 국내에서 자체 개발된 브랜드들까지 가세해 도시의 번화가들은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들로 넘쳐났다. 진화라고 해도 좋을까? 그럴 지도. 카페에 눌러 앉아 커피 값이라기보다는 인테리어 값인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대신 5천원 이내로 꽤 질 좋은 원두에서 뽑아낸 커피를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그렇다면 부작용은? 종이컵에다 먹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커피, 설탕, 크림이 적절하게 배합되어 나오는 달달한 자판기 커피가 맛없어져 버렸다는 것쯤이 되지 않을까.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해보니 짐짓 걱정되는 바가 있었다. 이전에 한국을 다녀오고 나서 겪었던 후유증을 다시 앓게 될까싶어서였다. 부모, 형제, 옛 친구들 사이에서 북적거리다가 뉴잉글랜드 지역 소도시의 겨울 속으로 돌아오니 내가 사는 곳이 얼마나 적막하던지. 한동안 그 기분에 다시 시달릴 생각을 하니 두려웠다.


그런데 괜찮았다. 계절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여름 체질이라 그런지 내 집 마당의 푸른 잔디와 뒤뜰의 숲을 보니 숨통이 트이기까지 했다. 모국에 대한 향수를 안고 사는 대신, 매연과 뒤섞인 끈적한 서울 공기와 맞바꾼 청명한 숨이 허락되는 삶도 꽤 괜찮은 거라는 위안도 생겼다. 다만 후유증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건 뜻밖에도 커피로 인한 것이었다. 매일 아침, 뒷마당 숲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마시던 커피가 터무니없게도 맛없어진 것이다! 이유는 뻔했다. 한국에서 나는 입맛을 끌어올려 온 거였다.


대중들의 입맛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업그레이드해 놓은 한국의 커피 비즈니스. 그게 다 내가 미국에 살기 시작한 이후에 점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대형 테이크아웃 커피전문점들에 질세라 지역 상인들마저 경쟁적으로 고급 원두를 들여와 커피 맛 제대로 내기에 박차를 가했다.


영악해진 입맛만큼 대중들도 박식해진 건 당연한 결과. 맛좋은 커피 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모자라 집에서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드물게는 직접 원두를 볶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의 지인들 대부분이 유럽에서 수입한 에스프레소 머신, 또는 최고급 브랜드의 에스프레소 캡슐 전용 기계쯤은 하나씩 집에 갖추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이런 젠장, 나만 촌스럽게 살고 있었다니!


뿐만 아니라 길을 가던 중 아무 가게나 쑥 들어가 사 마시는 커피들도 대부분 훌륭했다. 한국의 커피 원두 소비량이 전 세계를 통틀어 탑 클래스에 든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질적으로든 양적으로든 과연 그럴만하다 싶었다. 그렇게나 많은 원두를 소비하는 동안 혀끝은 또 얼마나 예민해졌을 것인가.


한동안 잊고 지내온 묵직한 맛의 에스프레소 향수에 시달렸다. 싼 값에 건진 기쁨을 줬던 드립형 커피메이커가 퇴물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에 죄책감이 생기는 것도 사실. 그러나! 버튼 하나로, 짙은 갈색 포말의 크림이 깔린, 그 완고하게 알싸한 액체와 조우할 수 있다니! 캡슐 속에 밀봉된 내 이십대의 향기와 매일 아침 만날 수 있다니!


유혹에 굴복하기로 결심한 뒤, 각 브랜드의 에스프레소 메이커들에 관한 소비자 리뷰들을 섭렵하고 쿠폰 입수 경로를 탐색하며 생각해 봤다. 나는 맛을 찾고 있는 걸까, 추억을 더듬고 있는 걸까. 모르겠다. 입맛보다 간사한 것이 마음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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