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리뷰하다 #1
종종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다.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하는 거다.
지금까지 사는 동안 알게 된 것이 하나 있다면, ‘확실한 것’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것뿐이다.
지금 내가 ‘알았다’고적었는가?
아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내가 ‘알았다’라고 생각하는 생각조차 확실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결국 나는 아는 것도, 확신하는 것도 없이 무지라는 베일로 눈을 가리고 앞인지, 옆인지, 뒤인지도 모를 곳으로 더듬어 나가고 있을 뿐인 존재인 거다.
이렇게 적으면 어떤 사람들은 ‘자기 비하’ 라거나 ‘자신감 부족’이라거나 ‘확신 실종’이라며 그렇게 살면 인생만 피곤해진다고 충고하기도 하고, 경멸하기도 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오늘은 첫 번째 리뷰로 이런 사람들에 대해 ‘나’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어보기로 하자.
나는 사람이지만 사람이 아닐 때가 있다. 정확하게는 ‘보편적인 사람’이 아닐 때가 있다는 거다. 옛날 얘기를 하나 해야겠다. 그 전에 하나 묻기로 한다. 오해라는 문제에 있어서 오해를 ‘하는 사람’이 더 문제일까, 오해를‘하게 만드는 사람’이 더 문제일까? 그리고 오해를 샀다면 해명을 해야 할까, 하지 않아도 될까?
어리석은 질문이라는 것을 알고도 물어본 것이다. 당연히 대답은 ‘그때그때 다르다’가 될 테니 말이다. 아, 이 대답이 당연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나’가 보기에 당연하다는 거다.
오해는 감정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행동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느낀다’가 아닌, ‘한다’라고적는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보면 오해는 행동에 더 가까운 것 같기도 하지만 그 행동이란 육체적인 것이라기보다 심리적인 것이기에 감정적이지 않다고도 할 수 없다. 그래서다. 그래서 오해를 풀기란 무척 어려운 거다. 행동이라면 행동을 그만 하면 오해가 풀릴 것이다. 그러나 오해는 행동을 멈춰도 완전히 풀리지 않는다. 오해를 ‘풀다’라고 하는 걸 보면 이건 감정의 문제처럼 보인다. 발단은 행동에 가깝고, 결말은 감정에 가까운 것, 그것이 오해가 아닐까.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다. 그래서 오해는 좀처럼 풀리지 않는 거다.
오해를 하는 사람이 더 나쁘다는 견해와 오해받을 행동을 한 사람이 더 나쁘다는 견해는 팽팽하게 맞선다. 그래서‘나’는 오해에 대해 해명하기를 ‘거의’ 그만뒀다.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하건, 내게 뭐라고 하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무념무상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다. 물론, 마음이 쓰인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해명을 하고, 오해를 풀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그러나 언제나 친절하지는 않다. 무례한 사람에게도 친절하게 대할 때가 있지만 무례하게 대할 때도 있다. 오해받기를 즐기지도 않지만, 오해받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나는 어쩔 수 없는 나다. 그들은 나를 터럭 하나만큼도 바꿔놓을 수 없다. 나는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사람이다. 하나의 신조 위에서 말이다.
그 하나의 신조란,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라”하는 것이다. 피해를 입어 마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남’에서 자연스럽게 제외된다. 그들에게는 고의적으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기분의 피해일 수도 있고, 물질의 피해일 수도 있으며, 신체의 피해일 수도 있다.
오랜 시간을 두고 고민했던 ‘화두’가 하나 있었다.
그 고민의 핵심은 ‘선함’이었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단순하게는 ‘악함’의 반대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단지 악하지 않은 것이 선한 것이 되지는 못한다. 오히려 무엇을 해줄 때 비로소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만히 있는 사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우습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이. 무위는 악인가? 물론, 때로는 그렇다. 하지만 무위 자체가 악인 것은 아니다. 왜 하지 않았는가를 생각해야 하고, 할 수 있었는가와 할 수 없었는가도 따져봐야 한다.
지금의 나는 선하기만 한 것도, 악하기만 한 것도 아닌 보통의 존재로 살아가고 있다. 슈퍼 히어로가 되지 않는 한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예정이다. 오해를 받기도 하고, 오해를 하게 만들기도 하면서 살아갈 예정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되도록이면 변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고 싶어서 했고, 이미한 것이 어떤 결과를 낳든 그것을 받아들이며 살겠다.
이제부터 적는 것은 해명이기도 하고 변명이기도 한 것이 될 거다. 사람은 변하지 않으면서 변하는 법이니까.
‘나’는 자신감이 부족한 편인지도 모른다. 확신이 실종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스스로를 비하하지는 않는다. 내가 스스로 “아직 멀었어요”, “잘 못해요”라고 하는 말은 진심이다. 내 안에 세워둔 잣대에 대봤을 때 너무 미흡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거다. ‘완벽주의자’ 같다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그릇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
타인을 속이는 게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보다 낫다. 타인은 속은 줄모를 수 있지만 스스로는 밝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속이는 것을 거북해하면서 타인을 속인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해서는 타인 역시 속여서는 안 되는 것이 되는 거다.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무례가 된다’고 충고해준 사람이 있다. 요즘은 덜 사양하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건 하나도 없다. 사양하는 게 사양하지 않는 것보다 더 쉽더라는 거다.
이 리뷰가 산으로 갈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런 횡설수설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를 기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읽는다고 해도 얼마나 전달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뭐, 세상에 확실한 것이 어디 있나. 그저 꾸준히 적어나갈 뿐.
앞으로 어떤 일이 있었거나, 생각이 떠올랐거나 해서 ‘나’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면 하나씩 리뷰 하기로 한다. 살아가며 적어도 ‘나’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상태로 살고 싶다. 다른 사람을 알기도 어렵지만 늘 함께 있으면서도 나 자신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게 참 부끄럽기만 하다.
확신할 수는 없겠지만 가능성을 높일 수는 있을 거다. 이렇게 하나하나 쌓여가는 기록이 곧 ‘나’를 만들고, 둘러싼 많은 것들을 보여줄 것이다. 거기에 걸어보기로 한다.
내가 쓰고 남기는 글이 곧 나다. 그것으로 오해가 생기더라도 조금의 원망도 없으며, 오해가 풀리더라도 기뻐할 것도 못되는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