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_프랑소와즈 사강
시대와 세대와 세계를 초월한 인간의 공통점이 있다.
이 공통점은 하나가 아니다. 다만 이번 이야기에서는 한 가지만 이야기하기로 한다.
'망각'
인간은 언제나 너무 많은 것을 잊거나, 잊어가거나, 잊어버렸다는 것마저 잊은 채 살아간다.
망각이 있기에 인간이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쩐지 그 이야기는 나약한 면모를 받아들이지 못하기에 내놓는 비겁한 변명처럼 들린다.
인간은 항상 존재하는 것은 쉽게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면서 그 부재를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 닥쳤을 때에야 소중함을 깨닫고 후회한다. 그러나 그 후회조차 오래 버티지 못한다. 존재를 잊고 부재를 실감하며 후회했던 것마저 잊어버린다.
아, 망각.
잊고자 하는 것은 잊지 못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찌 그리 쉽게 사라지는가.
프랑소와즈 사강의 소설 <슬픔이여 안녕>을 읽은 건 두 달도 더 전이다. 이미 대부분을 잊어버렸다는 것 역시 비밀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하기에 모두 사라지기 전에 그 기억을 붙들어 여기에 남긴다.
줄거리만 보면 아주 아주 간단하다.
아빠와 단 둘만의 생활을 만끽하며 살아가는 딸이 있다. 다시 결혼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아빠가 재혼을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된 딸은 그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한다. 그런데 막상 그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되자 딸은 어쩐지 불편함을 느낀다. 악의로 시작한 것은 아니지만 딸은 아빠의 시선을 다른 여자에게 돌리게 하고, 그 일로 상처받은 여자는 우연한, 아마도 우연한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딸의 첫사랑도 끝이 난다.
딸의 이름은 세실, 아버지의 재혼 상대였던 여자의 이름은 안느, 또 다른 여자의 이름은 엘자다.
열일곱, 세실은 사춘기다. 하지만 부모에게 못되게 군다거나 반항을 위해 되바라진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막 가는 아이는 아니다. 아버지의 재혼 이야기에 불편함을 느꼈던 것은 반항에서가 아니라 어쩐지 지금까지의 아빠와는 다른 사람으로 변해버릴 재혼 이후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줄거리를 적어놓고 보니 뭔가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이 정도 밑그림뿐이다. 이것이 지금의 나, 2개월이라는 망각의 시간을 보내고 남은 이야기에서 꺼내 놓을 수 있는 최대한의 기억이다.
<슬픔이여 안녕>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된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울적하면서 한편으로는 노곤하고 달콤한 상태가 뒤섞인 묘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런 감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몰라도 나는 이 어설픔 감정을 '슬픔'이라는 거창하고 아름다운 이름으로 불러야 할 것인지를 놓고 주저하고 있다.
어쩐지 열일곱 다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울적하면서 노곤하고 달콤한 감정을 '슬픔'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부분이 말이다. 현실의 열일곱이 어떤지 모르지만 현실과 동경과 두려움이 미묘하게 섞여있는 시기에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슬픔에 대한 망설임으로 시작해, 슬픔을 떠나보내는 것으로 끝이 난다고도 할 수 있다. 모호하고 불분명했던 그 감정이, 슬픔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슬픔이 달콤할 리 없건만 그럼에도, 첫 문장을 읽고 나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슬픔의 무엇이 달콤할 수 있는가?'하고.
어쩌면 슬픔에 달콤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기쁨과 행복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감정을 음미하는 순간, 그 감정을 만든 모든 순간들이 그 슬픔에 녹아 있으므로.
그러나 이런 감상 역시 순간이다. 그 순간에 앞선 순간이 몹시 씁쓸했기에 느껴지는 달콤함. 쓰디쓴 에스프레소가 달콤하게 느껴지는 원리와도 다르지 않은 달콤함이기에.
세실은 연애가 무엇인지 궁금해한다. 여기에 안느는 이렇게 답한다.
"그것은 다른 것이야. 그것은 어떤 사람의 부재를 강렬하게 느끼는 것."
세실에게 연애란 순간순간의 감각과 감정의 파편 혹은 조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순간은 언제나 지나가서 사라져 버린다. 그것이 모여 연애가 된다는 것이 현실적인 결론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연애란 그런 것일까?
안느는 '다른 것'이라고 한다. '부재를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애석한 것은 곁에 있는 동안에는 부재를 실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언제나 사라지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연애라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연애가 끝나면 이별 혹은 결혼이 시작되는 걸까?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연애 속에 이별이 있고, 결혼 안에 연애가 들어갈 수는 없는 걸까?
솔직히 이 소설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농담이든 진심이든 자신이 꾸민 일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음에도 그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면서 자신의 첫사랑이 끝난 것과 훨씬 나이 들어 버린 것처럼 보이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슬픔에게 '안녕'이라고 말하다니. 이런 결말이라니.
아마도 내가 이해하지 못한 어떤 것, 발견하지 못한 어떤 점들이 이야기 속에 들어있었던 것일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이 이럴 수는 없다.
아, 그러고 보니 '안녕'을 원제에서는 Bonjour로 적었다. 재밌는 건 우리말 '안녕'처럼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는 거다. 프랑스어를 모르기에 확언하기는 어렵지만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모두 bonjour라고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세실은 슬픔을 떠나보낸 게 아니라 맞아들인 것인지도 모른다.
첫 문장에서의 망설임이, 이제는 '그래도 되겠다'는 승인이 된 것이 아닐까.
반은 농담으로 하는 말이지만,
역시 여자는 모르겠다.
어린 여자란 더욱더.
뭐, 이런 시답잖은 결론.
슬픔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