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칼럼
<이것은 어떤 대화를 곱씹는 동안 떠오른 생각을 기록한 것이다. >
연결의 시대다.
우리는 온라인을 통해 거의 어느 곳에서든, 언제든, 원하는 사람과 연결될 수 있다. 또한 오프라인 상에서의 접근성 역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다. 서울에서 부산에 가는 것도 2시간 30분이면 가능하며, 앞으로 더 빨라질 것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러한 연결의 가능성이 커졌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더 외로워졌다는 것이다.
"왜?"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우리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물리적이거나 문자적인 연결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 대 인간의 접촉, 연결을 늘 갈구한다. 이러한 접촉 혹은 연결은 내부, 생각, 마음까지의 소통을 의미한다.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많은, 지나칠 만큼 잦은 연결의 기회가 있지만 그 연결의 대부분은 표면적이거나 일회적인 것이다. 한 번의 접촉이 끝나고 나면 마치 없던 것처럼 휘발되어 사라지는 무수한 연결들.
우리가 연결을 원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된 가장 주요한 원인이 아닐까.
이 시대는 배움이 쉬워진 시대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원하는 분야, 흥미를 갖고 있는 주제에 대한 강연을 찾아다니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이들이 강연을 찾아다니는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배움을 통해 다른 세계 혹은 사람들과 연결되고자 하는 소망을 실현하기 위함이 아닐까 하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렇지 않습니까?"
길고 복잡하게 쓸 생각이 없기에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만약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연결'이라면, 단순히 강연을 찾아다니며 듣고, 배우는 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거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강연의 속성 상 깊이 있는 연결이 불가능하며, 대부분의 경우 강연자의 생각이나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수준에서 끝나기 때문이다. 강연 후에 주고받는 질문과 대답 역시 겉핥기 수준에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깊이 들어가기에는 방해꾼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기술의 습득이나 단순 지식의 확장을 위해 강연을 찾아다니는 거라면 그것은 더 무의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목적이 없는 기술이나 지식은 그 활용과 이해에 한계가 명확하며, 독특한 경지에 이를 가능성이 극히 낮기 때문이다. 그런 노력을 기울일 시간에 차라리 열 살짜리 조카와 마주 앉아 조카의 길지 않은 인생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카와의 대화(물론 조카가 무척 귀찮아할 가능성이 크다)는 최소한 조카와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서로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여지도 커질 뿐 아니라 대화의 능력도 키울 수 있다.
아이가 어른과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되는가? 하고 물을 수도 있겠다. 물어보나 마나 한 문제다. 물론 가능하니까.
인간은 인생의 거의 모든 순간에 결정적인 고민을 하나나 둘쯤은 갖고 있다. 아홉 살에게는 아홉 살의 고민이 있고, 서른 살에게는 서른 살의 고민이 있다. 이 두 고민은 질적으로 어느 쪽이 우위에 있다거나 더 심각하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둘 모두에게 그 고민들이 모두 결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린아이의 역시 훌륭한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경험이나 생각이 비슷한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면 이것은 또 다른 장점을 지닌다. 어린아이들은 경험의 양적인 측면에서 확실히 더 나이가 많은 사람보다 적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오히려 다른 면에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그런 이유로 생기는 제약이 분명히 존재한다.
생각에 있어 다양성은 분명 중요하지만, 깊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취약할 수 있다. 깊이 들어가려고 해도 그 깊이에 공감하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더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슷한 사람과의 대화는 생각의 깊이를 키우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조심해야 할 것은 지금 말하는 비슷함이 생각의 방향이 같다거나, 동일하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각이 열려있는 점이 비슷하다거나, 경험이 비슷하다거나 하는 식의 비슷함 들을 말하는 거라는 얘기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거울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그 거울이 지금처럼 또렷하게 우리의 모습을 비춰준 것은 아니었다. 청동 거울은 거울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희미한 모습을 볼 수 있었을 뿐이며, 물을 통해서 보이는 모습은 불어오는 바람에 일그러지거나 흔들리기 쉬웠다.
비슷한 사람과의 대화는 비유하자면 더 또렷이 내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마주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강연 혹은 강의는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듣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정리하거나 확장하거나 새롭게 한다. 일방 통행인 셈이다.
대화의 경우에는 내가 말을 함으로써 자신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새롭게 발견하고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동시에 대화 상대방의 반응을 통해 그 반응에 다시 반응을 보이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된다. 이때에 상대방의 나이가 크게 관계가 없어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에게 자신을 비춰보는 게 아니다. 심지어 대화의 순간에도 자신을 비춰보는 건 자기 안의 자신이다.
흔히 다양한 경험을 해 볼 것을 권하는 이유는 다양한 사람들의 반응에 반응하는 자신을 경험하고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많은 것을 해보는 게 좋으니까 같은 이유가 아니라는 거다.
강연보다 대화를 권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강연의 수동성 때문이다. 강연의 전제는 강연자의 말을 듣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듣기 위해 강연에 간다. 강연에 말을 하러 가는 사람은 강연자 하나뿐이다. 솜씨 좋은, 훌륭한 강연자는 흔히 강연을 듣는 이들의 반응을 듣는다고 말한다. 아직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그러한 소통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강연이 '좋았다'고 기억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나는 대화를 즐기는 편이다. 논쟁적인 대화에서부터 화기애애한 대화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 생각과 생각을 나누는 과정은 즐겁다고 느낀다. 하지만 이 즐거움의 정체는 그 시간 속에서 느끼는 재미만이 아니다. 물론 그 시간이 즐겁고 재밌다면 더 좋다. 그러나 진짜 즐거움은 대화가 끝난 다음에 찾아온다.
"왜 좋았을까?"
즐거운 대화에는 뚜렷한 연결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에 많은 이름을 붙이는데, 교감이라고도 하고 소통이라고도 하며, 의미의 발견이라거나, 깨달음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것들에는 어떤 필연성도 없다. 그저 불현듯 찾아오는 것이다. 강연에서도 이러한 것을 종종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주어진' 것이지, '얻어 낸' 것이 아니기에 곧 사라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화를 하는 과정은 강연을 듣는 것보다 더 많은 집중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대화는 강연보다 더 뚜렷하고 분명한 상대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만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대화는 서로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 원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화를 한다고 하면서 뜬구름 잡기 혹은 날씨 물어보기 식의 얘기만 했다면 그건 대화를 했다고 할 수 없는 게 된다. 상대방의 의도, 몸짓, 목소리와 표정 그 모든 것이 대화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그 모든 수단은 대화의 상대방인 나를 향해 집중하게 된다.
강연자 역시 청중에게 집중하겠지만 청중은 보통 여럿이기에 분산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집중과 이해가 덜 요구되는 이유다.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면 그것은 어떤 훌륭한 강연을 듣는 것보다 더 나은 경험으로 우리를 이끌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여전히 잘 듣는 것과 분명하게 말하는 것에 미숙하지만 앞으로 조금씩 나아지도록 노력할 생각이기에 더 나아질 거라고도 믿는다.
나를 알게 해주는 대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것은 세상의 그 어떤 강연보다 나를 감동시킨다. 그것이 내가 강연보다 대화를 이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