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 중 <루카> 읽기를 통해
한국 문학 스터디 모임을 통해 조금이나마 한국 문학을 읽기 시작한 지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2015년 젊은 작가상 수상 작품집인데, 한 가지쯤 이야기해 두고 싶은 것이 있어 적어둔다.
다시, 새삼스럽게 '유연함'을 이야기하는 게 부끄러울 만큼 책을 읽을 때나 사람을 대할 때나 사고의 유연함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그 생각에 대해 불쑥 의문이 떠올랐다.
의문은 단순하다. 한 문장으로 적을 수도 있다.
"나는 정말 유연하게 읽어나가고 있는가?"
이렇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는 작품집 속 수상작 가운데 한 편인 윤이형의 <루카>였다. <루카>는 퀴어(성소수자를 포괄하는 표현)인 두 사람(그 가운데 한 사람의 진술)의 이야기다. 이 작품이 지닌 문제의식은 퀴어들의 이야기를 그 소수자들의 이야기로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안에 인간 보편의 속성이 내재해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 일어나는 많은 문제와 어려움들을 '보편적인 것'으로 희석시켜서는 안 되고, 그 문제들을 직시하고 대면하는 것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해소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보였다'는 모호한 표현을 적은 것은 그것이 가장 솔직한 표현이며, 가장 사실에 가까운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을 읽기 시작할 때의 내게는 어떤 사전 정보나 준비 같은 것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저 '보통의' 소설을 읽는 것처럼 읽었다. 첫 문장의 매력을 알아보지 못하고 '뭐야, 또 인물에서 시작하는 이야기야?'하고 생각했을 정도다. 초반을 넘어설 무렵 문득 '이거 뭔가 묘하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화자가 남자 같은데, 그 사랑의 상대 또한 남자처럼 읽혔기 때문이다.
"아, 이거 동성애 얘기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퀴어'에 대한 이야기다. 이야기 속에서 퀴어라는 표현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아, 그런 게 있나 보다' 정도였을 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 단어의 뜻을 이해했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아무것도 몰랐고, 나와 무관한 이야기였기에 그런가 보다 했을 뿐이었다.
작품을 읽을 때의 나는 거의 '아무 생각이 없다'는 표현이 아주 적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생각이 없다. 이 증상은 특히 단편, 그중에서도 한국 단편을 읽을 때 두드러진다.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이 작품 역시 그런 상태로 읽었다. 거기에다 급하게 읽기까지 했다.
이야기를 다시 전체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었던 건 작품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으면 서다. 한 평론가의 이 작품에 대한 평가가 '보편적 러브스토리'였다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를 해치는 행위라는 것이었다.
'러브스토리', '보편적 사랑 이야기'
이 말은 곧 어떤 사랑에나 만남이 있고, 갈등이 있으며, 다툼이 생기고, 결별 또한 뒤따름을 의미한다. 이 말은 물론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주 옳은 것도 아니다. 작품이 의도하는 바, 진의가 무엇인지는 사실 작가에게 달려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는, 오히려 더 많은 부분이 독자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그 평론가가 일반의 독자였다면 아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정도에서 넘어갔을 수도 있을 거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지닌 자'였다. 권위를 가진 자였다. 아이러니한 것은 <루카>가 그 권위와 권력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너그러운 포용과 이해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퀴어, 성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은 사실로서의 현상이다. 그것은 실체가 없는 유령 같은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받아주고 이해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차별이 존재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적으면 "'너희'는 이상하지만, '우리'가 이해해줄게."라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미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생각이 사고의 저변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이들이 말하는 알량한 '이해의 정체'다.
본래 이해란 대등하다고 전제된 존재 사이에 상호적으로 작용해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다. 한쪽이 다른 쪽에 일방적으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견고함 혹은 확고함은 그 자체로는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가치 판단과 이해에 있어서는 그리 좋은 역할을 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오래전부터 그렇게 느꼈던 것 같지만, 지금과 같은 뚜렷한 인식은 없었다. 그리고 이 인식이 책을 읽는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했다.
내게 있어 독자는 거의 절대자의 자리에 위치한다. 예를 들자면, <루카>를 로맨스, 러브스토리로 읽는다고 해도 그 독자에게는 아무런 책임도 물을 수 없다는 거다. 그가 이해한 것이 바로 '그것'이기에 그 이야기는 그에게는 '그것'으로 남아도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재밌는 건 '그들은 그래도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는 거다.
나는 절대자로의 권위를 누리는 독자의 권력을 '오만'이라고 생각한다. 오만은 비단 건방짐과 거만함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만을 의미한다고 해도 그 배경이 모두 동일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PRIDE'
프라이드를 지닌 자는 오만해 보인다. 독자로 생각해보면 그는 '읽은 자'이기에 오만할 수 있다. 그것은 읽은 자의 권리라는 거다.
"독자는 얼마든지 오만해도 괜찮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내 태도였던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 걸까?
나는 '읽은 자'였을까?
읽는다는 행위는 단순하지만 그 안에 내재된 가치와 구조는 간단하지 않다. 읽는다는 것은 텍스트를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 텍스트가 품고 있는 의미를 해독하고, 이해하는 과정이 진정한 읽기인 거다. 중요한 것은 그 이해에는 층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층위를 만드는 것이 가치관이라는 것도 읽기를 까다롭게 만든다.
"이 모든 것을 배제하고 자유롭게 읽을 때 완전한 읽기가 가능하다!"
이런 말도 좋다. 그러나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모든 순간 '판단'을 내린다. 단순하게는 재미있다와 재미없다로 시작해서, 그 표현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도 저마다 어떤 결론에 닿음으로써 읽기를 끝내는 것이다.
'완전히 자유로운 읽기'란 유토피아 같은 것인 셈이다.
고백하자면 지금까지는 읽은 자로서 누리는 오만을 자랑스러워했다. 왜냐하면 나는 '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정말 읽어왔던 것일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게 우습기도 하고, 앞으로 어느 순간에는 다시 이 말을 뒤집는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부끄러워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다짐할 수밖에 없다.
"유연하게 읽어나가자."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나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는 나쁘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다.
"너희가 뭐라고 하든 나는 이렇게 생각할 셈인데, 너희가 하는 말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게." 이 편이 그나마 조금 낫다.
느닷없는 얘기를 하자면 퇴계 이황의 일화 가운데 "너도 옳고, 너도 옳고, 그 말도 옳다"는 것이 있음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옳은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화가 아니다. 절대적인 것이 없기에 서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가깝다. 이해는 일방적일 수 없다.
"너희는 이해하지 못해." 도, "우리가 이해해 줄게."도 폭력적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소수자의 "이해하지 못해"라는 생각에는 그만큼의 사정이 있음을 안다.
<루카>의 평론으로 돌아가자면, 가장 민감한 화두가 된 것이 다음의 문장이다.
퀴어들 간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은 보편 질서와의 차이를 무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퀴어를 퀴어로 환원하는 것"이 이성애적 가부장제임을 말하기 위해서다.
오혜진, <루카> 해설 중
이 이야기를 읽고 얘기를 나누면서 내가 상상한 평론은 대략 이런 것이었다.
"차이는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 속의 두 사람이 사랑하고 이별하는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퀴어 간의 사랑이나 이성애자들의 사랑에는 보편적인 공통점이 존재한다. 이 작품은 그런 보편성을, 퀴어 간의 사랑(보편적이지 않은)을 통해 보여주었기 때문에 탁월하다."는 식의 이야기.
그러나 오혜진이 말하는 것은 그런 식의 이해는 몰이해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 보편적인 것이라는 이해는 진짜 문제를 외면하려는, 혹은 모른척하려는, 혹은 무시하려는, 이 사회의 보편적인 가치인 '이성애적' 가부장제의 허울이라는 것이다.
어떤 인간의 가치도 '환원'이 필요한 것이 될 수 없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 가치를 갖고 있으며, 지금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훼손하고, 없는 것으로 하는 것을 멈추면 되는 것뿐이다.
그들이 정말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말아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얼마 전 계몽에 대해서 말하기도 했지만, 세상 모든 것을 보편타당한 것으로 보는 것은 아주 폭력적인 사고방식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른 사람도 원한다거나 내가 하는 생각과 다른 사람의 생각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 아님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러나 많은 가해자들은 "그들이 무엇 무엇하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이것이 폭력이 아니라면 무엇이 폭력인가?
책을 읽어오며 느꼈던, 지녔던 오만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것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우며 절대적인 권리라는 나의 닫힌 생각이, 막힌 사고가 부끄럽게 느껴진 거다.
앞으로도 감상을 적을 때는 "나는 이렇게 읽었습니다"하고 적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적은 것이 전부가 아님을 잊어버리지는 않을 셈이다. 나의 오만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유연하지 못한 마음 가짐이다.
나는 점점 더 오만해질 생각이다. 확고하지만 유연해짐으로써 그렇게 될 생각이다.
새삼 느끼지만 내가 책을 읽는 건 정답을 찾기 위함이 아니다. 더 나아지고 싶어서다.
내가 이해받고 싶은 만큼, 이해할 수 있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싶어서다. 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눠봐야 한다.
간접의 경험은 향기로운 향신료이자 조미료가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오로지 나의 경험이라는 가지에서만 열린다. 그러므로 나는 조금 더 오만해질 것이고, 그만큼 유연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