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철든 아이의 녹

『이해의 얼굴들』

by 가가책방
莫言(모옌)은 '말하지 않는다'는 뜻의 단어다. 작품으로만 말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나는 차라리 말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이야기를 시작한 건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한 개인에게서 가장 먼저 파괴하는 건 '동심'이다.

선비(先非) 씨가 들려준 이야기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

부모는 아이가 눈만 깜빡여도 좋아한다.

손가락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기라도 하면 아이처럼 까르르 웃는다.

옹알이를 시작하면 저건 무슨 말일까, 이건 무슨 뜻일까 궁리에 궁리를 즐겨한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란다.

뒤집기를 하고 기기 시작하면 걷기는 금방이다.

한 단어를 배우고, 말을 따라 하고, 문장을 만들 줄 알게 된다.

처음에 부모는 단지 부모의 말을 듣고 반응하는 것에 놀라고 기뻐한다.

중간에 부모는 부모의 말을 못 알아들으면 답답해한다.

나중에 부모는 부모의 말을 듣고도 모른 체 하면 화를 낸다.

어떤 부모는 혼내기를 넘어 매를 들기도 한다.

이제 아이는 하나를 또 배운다.

'언제나 부모가 칭찬할 일을 하라.'

말을 알아듣는 것보다는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하는 일.

아이는 사랑받고 싶기에 부모가 칭찬해줄 일을 하려고 한다.

부모는 그런 아이를 모르기에 어느 순간부터 '말도 잘 듣네'를 연발한다.

자기들 교육이 성공으로 가고 있다고 철썩 믿는 거다.

선비(先非) 씨는 칭찬했을 부모를 안타까워한다.

선비(先非) 씨는 칭찬에 기뻐했을 아이를 슬퍼한다.

이제 아이의 동심에 철이 스미기 시작했으므로.


어린아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아이를 어른들은 칭찬한다.

"이 녀석 철들었네."

아이들은 뿌듯해한다.

철이 들어간다는 게 재앙인 줄도 모르고.

철이 든다는 건 녹슬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철은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격렬하고 급격하게 녹슬어 간다.

녹슬지 않는 방법은 세상의 이물과 섞여 합금이 되는 거다.

자신을 잃고 세상에 섞이지 않으면 그 자신조차 사라지게 만드는 게 바로 '녹'이다.

철들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 피에는 녹이 피기 시작해, 하루하루 탁해지고, 굳어간다.

점점 볼 수 있던 것을 볼 수 없게 된다.

점점 들을 수 있던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점점 할 수 있던 것을 할 수 없게 된다.

모든 게 '녹', 다른 이름으로는 '독' 때문이다.

선비(先非) 씨는 철든다는 건 녹이 슬기 시작하는 거라고 말했다.

'녹'은 '독'이라고 말했다.


선비(先非) 씨는 늦둥이에 막내다.

위로 열 살쯤 터울이 지는 누님이 있었다.

이 누나가 얼마나 선비(先非) 씨를 아꼈는지 엄마가 신경 쓸 일이 거의 없었단다.

선비(先非) 씨는 말을 잘 듣는 아이였다.

눈치도 빨랐다.

말도 잘 듣고 눈치도 빠른 아이는 자라서 두 가지 가운데 하나가 된다.

하나는 효자다.

다른 하나는 부모까지 등쳐먹는 호래자식이다.

선비(先非) 씨는 둘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

대신, 선비(先非) 씨는 한량이 되었다.

선비(先非) 씨는 일하지 않았다. 다만 한가로이 다니며 이해를 구했을 뿐이다.

처음부터 선비(先非) 씨가 한량이었던 건 아니다.

고등학교 때의 일이라고 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선비(先非) 씨는 집에 가방만 두고 다시 나가려 했다.

그때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온 엄마는 엄숙한 표정으로 선비(先非) 씨에게 '나가지 말고 집에 있어'라고 말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선비(先非) 씨는 그런 말을 들은 것 같다고 믿었다.

선비(先非) 씨는 너무나 눈치가 빠르고, 말을 잘 듣는 아이로 자라 있었다.

엄마의 표정과 눈빛에서 선비(先非) 씨는 어떤 예감을 했다.

'이 집에 뭔가 큰 변화가 기어코 일어나고 마는구나.'

선비(先非) 씨는 그날 집에서 나가지 않았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이 분명 이렇게 물을 거였다.

"어제 왜 안 왔냐?"

덧붙여 이렇게 비난할 거였다.

"너 때문에 우리도 못 놀고 왔잖아!"

어쩔 수 없었다.

선비(先非) 씨의 느낌은 친구들에게 가는 것보다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으므로.

선비(先非) 씨가 예감한 큰 변화란 누나의 결혼이었다.

그날은 누나가 결혼할 사람을 부모님께 소개하던 날이었다.

부모님은 두 분 다 누나의 상대를 못마땅해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도 했다.

누나는 강경했다.

"올해 안에 결혼할 거예요."

누나의 통보였다.

그런 누나가 낯설었다고 했다.

지난 27년간 말 잘 듣는 착한 딸로 자라온 '엄마 같은 누나'는 거기에 없었다고 했다.

거기엔 '누나 같은 누나'만이 있었다고.

선비(先非) 씨는 그날 두 가지를 깨달았다고 했다.

하나는 지금처럼 지낸다면 앞으로도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 하나 할 수 없을 거라는 거다.

그날 친구들과 놀러 나가지 못했던 것처럼 철든 선비(先非) 씨는 선비(先非) 씨의 욕구나 욕망을 억압할 거였다.

다른 하나는 내면의 철든 '자아의 목소리'를 거부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선비(先非) 씨의 누나는 선비(先非) 씨가 본 사람 가운데 그 누구보다 철든 사람이었다.

부모님의 말을 어기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하기도 전에 스스로 알아서 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누나가 자기 목소리를 낼 때는 그렇게 단호할 수 없었으니, 충격이기도 했지만 희망이기도 했던 거다.

그해에 선비(先非) 씨의 누나는 결혼을 해 집을 나갔다.

3년 후 선비(先非) 씨는 대학 진학을 이유로 집을 나섰다.

말 잘 듣던 선비(先非) 씨, 철든 선비(先非) 씨를 졸업하던 날이었다.

선비(先非) 씨가 성장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듣지 못했기에 알지 못한다.

다만, 많은 일이 있었구나 하고 추측해볼 뿐이다.


선비(先非) 씨는 '일찍 철들었던 것'이 제 1의 선비(先非:이전의 잘못)였다고 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는 이야기도 보탰다.

무엇을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선비(先非) 씨는 그저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라고 다시 한번 이야기했을 뿐이다.


대학에 간 선비(先非) 씨는 '이해 실험'을 시작했다.

첫 번째 '이해 실험'의 주제는 '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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