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게 '감상'

내 모든 생각들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감상문'

by 가가책방

돌아보면 나는 커다란 착각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음을 깨닫는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에서, 책에서, 글에서.

나는 얼마나 무수한 착각을 거듭해 왔던 걸까.

또 얼마나 무수한 착각을 거듭하고 있는 걸까.


조금 일찍 잠들었다고 엄청 일찍 일어나 버린 오늘.

이 새벽에 무얼 하자고 깨어있을까를 생각하다 마음에 든 걸 털어내지 않고는 다시 잠들 수 없을 것 같아 '새벽 감성'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끄적이기를 시작한다.


불과 얼마 전까지도 그런 착각을 하곤 했다.

작가만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있다'는.

진정한 작가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깨닫는다.

내가 쓰는 모든 것은 다만 본 것, 들은 것, 읽은 것, 경험한 것에 대한 감상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어쩐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읽지 않으면, 보지 않으면, 듣지 않으면 생각할 수도 없고, 쓸 수도 없었으니까.


"이것은 정말 내 생각인가?"

언제부턴가 이 물음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자기 것, 스스로와 가까운 것일수록 감상을 쓰기 어려워진다.

모든 감상에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거리가 없는 감상은 품위를 잃어버린다.

나의 것조차 남의 것처럼, 가장 끈끈한 것마저 무관한 것처럼 느낄 수 있을 때 '감상'은 시작된다.

감상에 내 감정의 개입이 드러나는 것이 이 '거리'를 무색하게 할까?

아니다.

이 감정조차 관객이 배우의 대사를 듣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반드시 찾아온다.

신세 한탄이나 넋두리가 감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것은 날 것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감상은 가공된 감정이다. 익히든 찌든 튀기든 볶든 삶든 조리든.

내 시선과 생각에 씹혀 해체되고 나열된 연속처럼 보이지만 분절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내 것이지만 내 것이 아닌 것.

감정이 감상이 되는 순간, 감정은 낯설게 느껴진다. 내 것이었음에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신적 존재로 군림할 수 없다고 해도 아쉬움은 크지 않다.

오히려 언제나 떠돌고 겉돌아서 내 것 같은 것이 없던 이 세상에 그나마의 내 것을 남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하게 되는 거다.

있는 것에서 또 다른 것을 있게 만드는 일이란, 사실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인간의 시체를 이어 붙여 거대하고 강력하지만 절망조차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 낸다.

괴물, 창조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가장 추악하고 절망적인 형태로 완성되어 세상에 드러난 모습.

욕구가 지나치게 담긴 글은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보는 기분을 느끼게 한다.

부끄러움과 후회로 대표되는 감정.


사랑을 할 때는 사랑을 '감상'하고, 병들어 아픈 순간까지 '감상'하고, 가깝거나 먼 사람의 죽음을 '감상'하고, 그런 감상을 쓰고 있는 나를 '감상'하는 일들의 반복이다.

감상, 이 감상들은 얼마나 진실할까.

노력하지 않으므로 여전히 부족함에서 나아가지 못하는 결핍된 문장들은 이 감상들을 얼마나 하찮은 것으로 만드나.

창밖은 가을,

새벽 빗소리를 떠미는 바람도 가을,

그 소리를 듣는 내 마음은 가을 가을,

비 오는 새벽이 이처럼 소란스러운 줄을 몰랐다.


지금까지 적은 감상들, 이제부터 적을 감상들이 얼마나 사실적이고 진실에 가까울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이면 어떻고, 거짓이면 어떤가.

진실이라는 믿음, 판단 역시 내가 내놓은 감상이 아닌가.

골몰함이 연연함을 낳는다.

연연하면 골몰하게 된다.

사각의 루프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생각의 함정의 전형이다.

고민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게 몇이나 될까.

사람의 마음이 궁금하다고 해서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해봐도 결국 그 생각은 내 생각일 뿐이다.

감상들,

모든 감상은 내 생각이다.

누구의 동의나 공감이 필수적인 영역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스스로를 한 번 더 돌아보게 한다는 데에는 커다란 의미가 있을 수 있다.

감상은 깊이를 모르는 바다 같은 세계다.

내 것이라고 믿었던 것에 삼켜질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잘 안다는 믿음, 익숙하다는 착각은 특히 더 위험하다.

감상의 나아갈 방향은 분명하지만 그 방향으로만 갈 자신은 없다.


거리감이 중요하다.

나는 종종 너무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므로, 쉽지 않을 거란 걸 안다.

그래도 나아졌다.

오래전 처음 감상을 적기 시작할 때의 글들은 그야말로 처참하니까.


내 마음이 어디쯤에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지는 다른 사람의 마음이 어디쯤에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려 하는지와 비슷할 만큼 알기 어려운 것이다.

"내 마음 내가 잘 알지."

이렇게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하지만 우습기도 하다.


스스로를 스스로가 감상가라 부르고 있다.

감상가, 자기 한 사람에 대한 감상쯤 너끈히 적어낼 수 있는 그런 감상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쓰는 모든 것은 다만 감상문 정도로 읽으면 될 그런 것이다.

거기에는 영원불멸을 바라는 소망도,

무에서 유를 창조하려는 야망도,

상대적 우위의 자만도 없다.


오히려 기고만장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무얼 적든 언제나 부끄러움을 느끼고 만다.

그러니까, 거리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멀어질 수 있는 모순된 거리감이 내 감상들에 내려 담기기를 바라는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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