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기
평소 지나치게 건강한 나지만 몇 년에 한 번씩 앓고는 했다.
마지막으로 앓던 날이 언제였는지, 그날의 증상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약간의 공통점이 있었다고 기억할 뿐이다.
길어도 이틀을 넘기지 않는다.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날이다.
약을 먹지 않는다.
병원에 가지 않는다.
아픔 외에는 생각하지 않는다.
누구는 그렇게 위로하기도 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아플 때가 제일 서럽지."하고.
설사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앓는 동안에는 조금의 서러움도 느끼지 않았으므로.
언제나 서러움은 나중에, 그것도 혼자가 아닐 때 찾아온다.
감정이란 그런 것이다.
혼자서는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것.
서러움도 감정이므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본격적으로 앓기 시작한 후 34시간이 지난 지금 시각은 2016년 8월 15일 20시 37분이다.
지금은 아주 잘 먹고 잘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여전히 대장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다.
한 시간 전에는 천도복숭아 하나를 먹고 나서, 저물녘의 선선한 바람을 쐴 심산으로 거리 공원도 한 바퀴 걷고 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자니 아래층에서 아저씨 하나가 올라왔다. 운동을 나가는 모양인지 몸을 푸느라 부산하다.
이제 막 회복의 기쁨을 느끼던 나였기에 그런 중년 아저씨의 활기가 나쁘지는 않았다.
안경을 벗고 나갔기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저물녘의 어스름 탓도 있겠지만, 그건 또 그것대로 좋구나 한다.
더위를 피해 이제 막 배운 자전거를 타러 나서는 길인지 여자 아이 둘을 아빠가 부른다.
"차 없어. 브레이크 잡으면서 천천히 내려와."
단란하다. 노을만큼 아름다운 풍경이구나.
새삼 감상적이 되어 그렇게 생각해버리고 만다.
신호 하나를 건너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한다.
사람이 제법 많다.
운동하는 사람, 음악 듣는 사람,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 영역을 표시하는 개, 짖는 개, 뛰는 개, 사람보다 강아지가 더 많아 보이는 건 안경을 벗고 나온 탓일 거다.
산책로 모퉁이를 돌았더니 바람이 마주 온다.
충분히 시원해서 선선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멀지 않은 이에게 "이제 바람이 제법 선선하네요."하고 전해주고 싶다.
방금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재생의 기쁨을 누린다.
오랜만에 걷는 기분으로 발걸음에도 신경을 쏟는다.
죽은 적이 없는 나는 부활할 수 없건마는 어쩐지 뭔가가 죽고 새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는 재생이면 어떤가 하고 만족해한다.
만족, 만족이란 얼마나 소박한 감정인가.
어느 저물녘의 선선한 바람 하나가 이토록 만족스러울 수 있음에야.
걷고 또 걷는다.
거리공원을 일주하면 1킬로미터쯤은 될 것이니 아직 이 바람을, 공기를 즐길 시간과 거리는 충분했다.
발걸음에서 주변으로 마음을 옮긴다.
그러다 문득 때 이르게 져버린 낙엽에 눈이 닿는다.
불끈하고 열기가 훅 끼치는 것만 같다.
'아, 나무도 열기에 지쳐 잎을 잃어버린 모양이구나.'
그제야 악착같이 울어대는 매미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매미도 한철, 이제 곧 울음이 바뀔 거다.
먼저 울던 매미가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다.
고개를 좀 더 돌려보니, 열기의 범인을 볼 수 있었다.
자동차, 공원 가에 주욱 늘어선 택시들이 켠 에어컨 열기가 바람을 타고 끼쳐온 거였다.
간간이 담배연기 냄새도 난다.
'담배 핀 택시는 타기 싫은데.'
상관도 없는 일로 생각이 흐르기 시작한다.
거리 공원 끝에는 구로구의 지명을 설명하는 조형물과 비석이 있다.
'구로구는 오래전 아홉 노인이 오래 장수하였음을 기념하여로' 시작했을 문구가 비석에 새겨져 있다.
처음 그 문구를 본 날 시시하다며 웃었던 생각이 난다.
생각해보면 장수란 게 축복인 것만은 아닌데 하며 돌아서 왔다.
반환점을 돌아오면서 '어라, 시력이 조금 떨어졌나?'하는 생각을 했다.
3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서 공원 이용 주의사항 중 어느 것도 읽을 수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열 때문에 일시적으로 시력이 떨어진 모양이다.
돌아오겠지 하며 돌아오는 길을 서두른다.
등으로 바람을 받으니 먼저처럼 선선하지는 않다.
그러면서도 손과 팔에서는 선득한 한기가 느껴져 자꾸 매만지게 된다.
체온이 아직 안정되지 않은 모양이구나 한다.
신호등을 20미터쯤 앞두고 있을 때쯤 보행신호가 켜졌다.
조금만 달리면 충분히 건널 수 있는 거리지만 그냥 걷기로 한다.
나는 여유로우므로.
신호등에 닿았을 때도 아직 세모 두 칸이 남아 있다.
그냥 기다린다.
잠깐 딴생각을 하는 동안 보행 신호가 다시 켜진다.
'오호, 신호가 짧구만.'하며 건넌다.
담배피는 아가씨들, 장보고 돌아가는 부부, 좌회전하는 자동차, 집으로 가는 나.
저마다의 저녁의 모습이 이렇게나 다르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일몰을 보지 못했다.
아무렴 어떤가.
어제 오전으로 돌아가 보자.
여느 때처럼 일찍 일어나버린 나는 전날 읽던 책을 뒤적인다.
그것으로 모자라 새로 읽을 책도 펼쳐본다.
새로 읽을 책을 20페이지쯤 읽다가 전날 읽던 책을 다시 집어 든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 , 민음사에서 출간한 판본이다.
50쪽 정도가 남았지만 거의 2시간이 걸릴 거라고 생각해서 미뤄둔 책이었다.
과연, 20쪽을 읽는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아침을 해서 먹고 나갈 생각으로 밥을 안쳤다.
빨래를 한다고 세탁기에 옷가지를 넣고 세제를 넣고 전원을 켜고 동작을 누른다.
방안은 오래전부터 난장판이었지만 요즘 들어 그 판이 더 화려해졌다.
청소는 내일로 미룬다.
밥이 되는 동안 샤워를 한다.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몸이 늘어지기 시작한다.
약간의 두통을 느낀다.
열이 나는 것 같아 이마를 짚어보니, 과연 열이 있다.
방금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땀이 난다.
뭔가 망했구나, 하는 기분과 왔구나 하는 예감이 교차한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몸이 시키는 대로 자리에 다시 눕는다.
그 와중에도 어제 읽던 책 가운데 다른 책을 집어 든다.
게일 포먼의 <네가 있어준다면>이다.
90쪽 정도가 남았다.
그럭저럭 다 읽고 났을 때 아무래도 좀 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치워두고 잔다.
다시 눈을 뜬다.
아직 1시도 안 된 시간이다.
2시간도 못 자다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을 마저 읽으려고 집어 든다.
이제 30쪽도 안 남았다.
15쪽쯤 읽었을 때 다시 잠든다.
2시가 조금 넘었다.
이번에는 1시간도 못 잔 셈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을 다시 읽는다.
눈이 아프다.
열 탓이다.
머리의 욱신거림도 더 심해졌다.
그런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중에서는 가장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시간을 지나고 있다.
낭만과 비극이 공존하는 장면이라니, 몸살에 시달리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것과 낭만적 비극을 겪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더 고통스러울까.
경험해본 사람만 알 일이다.
결국, 마침내 다 읽었다.
기절하듯 다시 잠든다.
시간이라도 많이 지났으면 했지만 그런 기대마저 배반한다.
아직 3시 남짓.
30분쯤 잠들었다.
어젯밤 11시 이후로는 먹은 것 없이 물만 마셨기에 허기질 만도 한데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아무래도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저어 두지 않아 조금은 굳어버린 새 밥의 슬픈 얼굴을 마주하니 어쩐지 미안해지고 만다.
냉장고에 든 반찬 두어 가지를 꺼내 꼭꼭 씹어 먹는다.
이것 보라.
내가 말하지 않았나.
서러움은 회상의 감정이라고.
새삼스레 돌아보려니 서러움 같은 것이 뭉클하고 솟아난다.
잠들었다 깨기를 반복한다.
잠들었을 때도 뒤척이기를 거듭한다.
깨고, 화장실에 가고, 물을 마시고, 잠들기의 무한반복이다.
중간중간에 병원에 갔어야 할까, 지금이라도 갈까, 약을 먹을까 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인다.
진통제, 해열제, 지사제.
약은 다 있다.
지금의 내 증상에 맞는 약은 모두 갖고 있었다.
정말 먹어야 할까?
인간의 몸은 병을 이기기 위해 열을 낸다.
해열제는 자신의 면역력을 떨어뜨릴 뿐이다.
인간의 몸은 몸 안에 든 나쁜 것을 배출하기 위해 배설을 한다.
지사제는 몸속의 독을 배출하는 것을 지연시킨다.
진통제는?
가뜩이나 지금도 매운맛을 잘 느끼지 못해 위장을 자주 괴롭히고 있는 형편이다.
통증은 살아있음의 증거라고 했다.
참을 수 있다면 참아야 한다.
병원에 가는 건 어때?
오늘은 휴일이다. 내일도 휴일이다.
병원이라면 응급실만 열였을 거다.
아직까지는 응급실에 제 발로 걸어간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제 발로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응급환자가 아니라는 얘기가 아닌가?
나는 아직 응급하지 않다.
하루가 길었다.
그렇게 무수하게 자다 깨기를 거듭했어도 밤 10시라는 걸 확인했을 때 조금 좌절하고 말았다.
오늘이 가면 어떻게 될 거라는 기대도, 내일은 나아질 거라는 확신도 없었지만 내일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저 그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시간은 더디 흘렀다.
여전히 허기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분명 뭔가를 먹는 건 잠자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따뜻한 밥에 찬 물을 부어 말아 꼭꼭 씹어 삼켰다.
지금 필요한 건 영양이 아니었다.
느껴지지도 않는 공복감을 채우는 일, 공백을 메우는 일이었다.
이후 8월 15일 새벽 4시까지 선잠을 잤다.
잠들 수 없던 가장 큰 이유는 통증, 고통을 이해할 수 없음이 괴로워서였다.
도무지 어디가 아픈 건지 알 수 없었다.
뼈 마디, 근육, 머리, 거듭 쏟아내는 대장, 눈, 삐그덕 거리는 관절들, 뜨거운 몸, 오한.
열이 나는 동시에 땀이 나면서도 추위를 느끼는 건 몸살이고, 거듭 쏟아내는 대장의 반란은 장염의 증상에 들어가며, 뼈 마디와 근육이 아픈 것이나 두통과 안통 역시 몸살 증상의 연장으로 볼 수 있음을 생각하면 원인은 단순할 수 있다.
몸살과 장염.
그런데 원인은 몸살과 장염이 아니지 않은가.
아침까지 멀쩡하다가 갑자기 나빠진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나는 살아남았다.
맨몸으로 홀로 싸워 이겼다.
작은 승리, 나는 아직 괜찮다.
8월 15일 새벽 어스름.
새벽빛이 방안에 드리울 즈음 잠에서 깼다.
그토록 뒤척였던 나의 좁은 방, 오른편에 나란히 늘어선 책장 속 책들이 보였다.
무슨 엉뚱한 깨달음인지, 어쩐지 반갑고 또 기뻐, 끌어안고 인사라도 하고 싶어 졌다.
'이 녀석들을 어서 읽어줘야지.'하는 미안함과 함께.
약간의 두통과 대장의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몸은 거의 원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제일 먼저 한 일은 어제 돌려놓고, 널지 않아 쉰 내가 날 빨래를 다시 하는 거였다.
세탁기를 두 번이나 돌리다니, 이 무슨 물 낭비인가.
아침을 먹고, 김연수의 소설 <굳빠이, 이상>을 읽기 시작했다.
반납일이 내일이라 마음이 급해졌다.
문득, 복숭아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사러 나가려다가 아직 10시가 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오픈 시간이 10시였던 것 같아.'라는 생각이었다.
결국 읽던 책이 아니라 다른 책을 뒤척이고 말았다.
오기사의 책 <청혼:너를 위해서라면 일요일엔 일을 하지 않겠어>다.
지독한 일중독자였던 오기사가 한 여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심지어는 '일요일엔 일을 하지 않겠어.'라고 말할 수도 있게 됐다는 이야기다.
앞쪽 30쪽 정도만 읽었는데, 이런 마음이라면 안 넘어갈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시할 때는 누구나 가장 자신 있는 걸로'라며 오기사는 글을 써서 보냈다고 한다. 물론, 나중에는 그림도.
나는 뭘로 대시할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10시가 넘었다.
가는 길에, '오늘은 광복절이지. 국경일이라 쉬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이미 나선 길인 것을, 거의 목적지에 닿았으면서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걸까.
잘 익은 황도 복숭아 4개와 천도복숭아 6개와 아직은 시퍼런 토마토 13개를 사 가지고 왔다.
과일 잔치다.
토마토란 녀석은 시퍼렇게 보이지만 실은 속은 이미 뻘겋게 익기 시작했기에 하루만 지나도 겉까지 빨갛게 익는다.
완전히 익은 토마토, 완숙 토마토라고 하는 녀석은 요리 재료로 쓰거나 화채를 해먹을 게 아니라면 식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걸 알아두면 좋겠다.
나는 이렇게 가끔 앓는다.
그리고 뭔가를 잃고, 뭔가를 얻는다
잃어버린 건 뭘까.
책 읽을 수 있는 날 하루와 휴일 이틀을 잃었다.
어쩌면 약간의 볼살을 잃었을지도 모르겠다.
어, 잃어버린 게 거의 없는 모양이다.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그럼 무엇을 얻었을까.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회복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어, 얻은 것도 거의 없나?
그런가 보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나는 한 편의 소중한 이야기를 얻었다.
어제의 이해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한 보상은 그것 하나면 충분하다는 것처럼.
내일을 기다리던 어제의 나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때로는 시간이,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는 흔한 깨달음이 한 번 더 나를 찾아주었음에 감사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