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긴 하루를 보낸 하루는 유난히 짧기만 하다.

수사적 반의법 같은 게 아니라,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by 가가책방

긴 하루를 보냈습니다.

오전 9시 10분 집을 나서서 다음 날 오전 1시 10분에 집에 들어왔지요.

열여섯 시간.

출근 시작에서 퇴근 마침까지의 소요시간이었습니다.


지난해 일본 광고 대기업 직원 한 명이 과로로 심신의 황폐를 겪다 결국 자살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해당 기업 사장이 사임했고, 지금 일본에서는 금요일 조기 퇴근제를 실시하는 회사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솔직히 조기 퇴근이라는 게 가능한지 어떤지는 알지 못합니다. 어떤 업무는 반드시 어떤 시점까지 끝내야 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그 성공이나 실패를 떠나 적극적으로 방법을 찾으려고 한다는 점, 그것만은 칭찬할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네, 오늘 유독 긴 하루를 보낸 탓에 지난해 일본에서 있었던 일까지 가져다 적게 된 게 맞습니다. 오늘처럼 1년 365일을 보낸다면 저도 견딜 수 없을 테니까요.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정말 다행한 일입니다.


이제부터 적으려고 하는 건 지극히 사적인 퇴근 풍경입니다. 관심이 없으신 분들은 읽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마지막 업무를 마친 시각으로 정했습니다. 하루의 마지막을 돌아보는 일도 무척 오랜만입니다. 그래서인지 어쩐지 어색하네요. 바로 시작하기로 합니다.


0시 5분.

전날 오후 4시쯤 시작한 업무가 최종 단계로 들어섰습니다.

8시간.

남은 건 결과를 메일로 보내는 일뿐.

길어도 10여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때의 기분, 마음을 파이(pie : 식용)로 표시해 보기로 합니다.

칠 분의 사(4/7)는 안도감이었습니다.

이번 달도 무사히 마감을 치렀다는 안도감.

칠 분의 이(2/7)는 만족감이었습니다.

기한 내에 마치다니 대견해라는 만족감.

칠 분의 일(1/7)은 허전함이었습니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깊은 데서 울려오는 공허한 울림을 닮은 허전함.


막차는 0시 29분이었습니다.

0시 22분에 사무실을 나섰고, 0시 25분에는 지하철 역에 닿았으며, 26분에는 승강장 벤치에 앉아 29분에 도착할 열차를 기다렸습니다. 벤치에 앉아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스마트 폰을 꺼내 어플 몇 개를 실행하고는 조금 기웃거리다 끄고는 멍하니 있었습니다.

0시 29분.

오차 없이(몇 초쯤은 있겠지만) 열차가 도착합니다.

당연한 풍경일 텐데, 이 시간의 열차는 거의 비어있습니다.

빈자리에 앉아 좀 전처럼 다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3분 후.

열차는 환승역에 도착했습니다.


종종 그런 날이 있습니다.

평소에 열차가 도착해야 할 시간에 열차가 도착하지 않거나, 아직 도착하지 않았어야 할 시간에 먼저 떠나버리는 경우요.

오늘이 그런 날이었습니다. 환승역에 도착하니 전광판에 표시된 다음 열차 위치는 9개 역 전이었습니다. 9개 역이면 대략 18분(실제로 다음 열차는 거의 18분 후에 도착했습니다).

환승역에서 계단을 오십 칸쯤 올라가서 환승 승강장에 닿았습니다. 다시 100미터 넘게 걸어서 아홉 번째 칸이 멈추는 자리까지 걸었습니다. 아홉 번째에 다시 네 번째 칸. 환승역에서 타는 자리입니다. 열차는 아직 9개 역 전에 있을 거라 이번에도 벤치에 앉아 기다리기로 합니다.

제가 앉은 벤치 오른쪽에는 열차를 기다리며 졸고 있는 여자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적잖이 피곤해 보였는데, 이 시간에 피곤하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을 바꾸고 보니 흔한 풍경 일부가 되더군요.


벤치에 앉아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에코백에서 이어폰을 꺼내 스마트폰에 연결한 후에 귀에 꽂은 겁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한 일은 음악 앱을 실행시킨 거구요. 곧잘 한 곡만 무한 반복해서 듣고는 하는데, 이번에는 제법 최신곡을 들었습니다. 최신곡이라고 해도 6개월쯤은 뒤처져서, 사실 지난해 여름에 유행하던 곡이더군요. 뭐, 듣기에 좋으니 아무렴 어떤가 합니다.

그다음으로 한 일은 '어제'(0시 30분이 넘었으므로) 사무실로 도착한 책을 뒤적인 거였습니다. 세 권쯤을 샀는데, 그중에서 라신의 비극 <페드르와 이폴리트>를 꺼냈습니다.

표지 제목을 읽고, 펼쳐서 내지 제목을 읽고, 서문 7페이지를 주석까지 읽었습니다. 솔직히 200년 넘은 고전들은 주석이 본문보다 많게 느껴지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아는 바가 적다 보니 주석을 건너뛰며 읽다 보면 이해할 수 있는 바도 적어져서 어쩔 수 없이 주석도 같이 읽는 겁니다(아, 주석 싫어라). 그래서 서문만 읽고 덮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열차는 도착하지 않았고(전광판을 보니 2개 역 전에 있더군요), 아침에 읽기 시작한 책을 꺼냈습니다. 거트 보네커트인 줄 알았는데 '거트 보니것'이라고 쓰여 있더군요. <제 5 도살장>이라는 소설입니다. 2차 대전 중 드레스덴 폭격을 경험한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드레스덴에 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기울이는 이야기가 앞에서 나옵니다. 아직 앞부분만 읽은 거라서 다음에 어떻게 되느냐거나 결말이 뭐냐고 물어도 답할 수가 없군요.

라신에 비하면 거트 보니것은 훨씬 읽기가 편합니다.

열차가 2개 역을 지나서 환승역에 도착한 후 다시 5개 역을 가는 동안 21페이지에서 시작해 30페이지까지 9쪽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29쪽에 인덱스 테이프를 하나 붙였는데, 인덱스 테이프는 파란색입니다. 뭐, 중요한 건 아니지만요.

표시한 부분은 이런 내용입니다.

그제야 나는 이해했다. 그녀를 그렇게 화나게 한 것은 전쟁이었다. 자기 아이나 다른 누구의 아이도 전쟁에 나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책이나 영화가 전쟁을 부추기는 데 한몫한다고 생각했다.
<제 5 도살장> 中

잘 쓴 문장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제 기준에서요. 왜냐, 앞에 내용이나 다음 내용을 몰라도 이 문장만 읽어도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직접 치른 사람들은 누구도 승자라고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전쟁이 없었다면 잃지 않았을 걸 너무나 많이 잃어버렸기에 승리 같은 건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고작 30쪽까지 밖에 읽지 않았기에 다음 내용은 얘기해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습니다. 흥미가 생기신 분이 있다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겠네요. 그리 길지 않으니까요(해설을 빼고 고작 265페이지).


자, 그렇게 해서 시간은 흘러 목적지 역에서 내린 시간이 1시 2분이었습니다. 다시 계단을 스물다섯 개쯤 내려와서 개찰구에 정기권을 찍고 통과한 다음에 다시 계단을 스물다섯 개쯤 내려갔습니다. 도로에 눈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얇은 얼음층이 있을 테고(운전석에서 보면 도로가 반짝거릴 테죠), 인도는 더 처참한 지경이었는데 200미터쯤 되는 인도가 내일쯤에는 스케이트장으로 변신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간신히 종종걸음을 면한 걸음으로 200미터 가까이 걸은 후에야, 눈이 치워진 인도가 10미터쯤 이어지더군요. 왼쪽을 잘 살펴보고 작은 횡단보도를 건넌 후에 보행 신호를 기다렸습니다.

내가 건너는 보행 신호 이전에 켜지는 보행신호 시간은 25초 정도 됩니다. 그런데 왜인지 내 쪽 보행신호는 20초 정도밖에 안 되더군요. 이상한 일입니다. 함께 신호를 기다리던 남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은 보행 신호가 켜지기 3초쯤 전에 무단 횡단을 시작하더군요. 정말 조금 과장하면 죽으려고 환장을 한 거 아닌가요. 고작 3초를 못 기다려서 무단 횡단이라니. 뭐, 대략 이런 생각을 하며 파란 신호가 켜진 횡단보도를 건넜습니다.

15초에서부터 카운트 다운이 표시되는데, 대략 횡단보도를 건너는 데 걸린 시간은 10초 정도였습니다. 물론 왼쪽과 오른쪽을 잘 살피면서 건너죠. 자동차도 운전자도 믿을 수 없으니까요. 오늘처럼 길이 미끄러운 날에는 특히요!


집으로 올라가려고 했더니 엘리베이터 버튼 위에 "긴급 점검" 푯말이 붙어있었습니다.

집이 8층인데 말이죠. 별 상관없는 일이라 8층쯤 가볍게 걸어올라 왔습니다. 계단 오르기가 건강에 좋다고 하잖아요. 도어록을 열고 들어온 집은 따뜻합니다. 18도가 이렇게 따뜻하다니, 기분 좋은 일입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이어폰을 빼고, 잠시 앉아서 멍 때리기를 한 번 더 합니다.

1시 13분.

피곤한 건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태랄까요.

습관적으로 옷을 벗어서 걸고, 보일러를 돌려 데운 온수로 세수를 하고 발을 씻습니다. 양치질도요.

물도 한 잔 따라서 마시고, 한 잔을 더 따라서 노트북 옆으로 가져옵니다.

노트북 전원을 누르고, 웹 브라우저를 실행시킵니다.

그다음에 오늘 0시 5분부터 있었던 일을 적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제 쓰던 걸 마칠 준비를 합니다.


유독 긴 하루였습니다. 하지만 기억에 남은 게 없어서 유난히 짧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기이한 일이죠. 하루가 길수록 하루가 짧게 느껴지다니.

사실 조금은 무모한 시도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0시 5분부터 있었던 일, 생각을 적는 일이 꼭 필요했습니다.


왜인지 눈치 채신 분이 계셨으면 정말 좋겠네요.


간단합니다.

유독 긴 하루였던 탓에, 유난히 짧게 느껴졌던 하루를 조금이라도 길게 만들고 싶어서 0시 5분부터의 이야기를 적었던 겁니다. 기억을 믿지 마세요. 기억은 너무 간단히 사라집니다. 어제 하루 종일 있었을 많은 걸 잊어버리고, 단지 '일'을 했다고 뭉뚱그리는 게 기억이란 게 하는 일입니다.


많은 것이 그렇지만 유난히 '기억'은 뭉뚱그려졌을 때 모호하고 또 무의미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루가 의미 없다고 느껴진다면, 하루를 여러 개로, 분 단위 혹은 시간 단위로 나누어 떠올려 보세요.

분명 많은 의미가 있던 하루일 겁니다. 분명히 말이죠.


고작 몇 자를 적었을 뿐인데 1시간이 넘게 지나가 버렸습니다.

아, 하루가 더 길어졌네요.

정말, 유독 긴 하루, 오늘은 정말 유난히 긴 하루로군요.


모두 한 주간 힘내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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