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 C의 Princess Diary #5

내가 낡아지는지 기억이 흩어지는지

by 가가책방

쌓아 올리는 시간은, 썩히고 버리는 시간보다 너무 적어서 밖에서 보면 낡아 보이기 마련이다.

시간의 속사정이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은 게 있다.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발표한 소설 <자기 앞의 생>에 시간은 세상에서 가장 나이 든 것이라는 얘기가 스치듯 나온다. 생각해보면 세상 이전부터 시간은 있었을 테니 세상에서 가장 나이 들었다는 생각은 참으로 옳다.


물건이나 건물, 사람까지도 만들어지고 태어난 지 오랠수록 낡아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만큼은 나이 듦과 낡음을 별개로 생각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시간은 오래됐지만 매 순간 새로워서 한 번도 낡은 적이 없으니 말이다.

순수한 시간과 존재 사이에서 어떤 불가사의한 화학작용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까.


그릇을 생각하곤 한다.

충분히 크지 않아서 살아온 시간 전부를 담지 못하고 흘려버리거나 잊어버리는 기억이라는 그릇을.

만약, 만약에 살아온 모든 시간을 담을 수 있었다면 늙어간다거나 낡아간다는 생각만큼은 하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니었을까.


모든 순간, 모든 만남, 모든 생각, 모든 것.

망각이 없다면, 모든 걸 기억한다면, 인간은 견디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럴 수도 있겠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게 아닐까.


낡았다는 건 처음, 새 것에 무언가가 더해지거나 빠진 상태다.

더해진 건 시간, 세월, 스쳐간 공기, 흘러내린 물, 닿은 손길, 그리고.

빠진 건 세상에 남을 수 있는 시간, 거의 모든 기억.


문득 내가 낡아지는 건 기억을 잃어가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 진다.

무엇이 있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된 건지 기억하지 못하게 된 탓이 아닐까.


오래된 성을 돌다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이 성을 만들고, 머물고, 오가던 무수한 존재들의 시간을 태반은 잃어버렸기에 자꾸만 낡아가는 듯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풀 한 포기, 돌 한 조각이 머금은 이야기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억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제 봐도 새로움에 놀라게 될 텐데.

거의 모든 시간을 잃고 남은 시간만이 쌓인 탓에 속 사정을 모르는 우리 눈에 낡아 보이는 게 아닐까.

밖에서 보기에, 밖에서 볼 수밖에 없기에 낡은 모습만 보이는 게 아닐까.


다행인지 아직까지는 나 자신이, 스스로가 낡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 다행스러울 수 있을까.


어떤 만화 속 대사처럼,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이 사람에게 잊히는 순간 죽는 거라면.

나는 얼마나 많은 순간, 무수한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걸까.

나 스스로도 지난해의 나, 지난달의 나, 어제의 나를 태반은 잊어버리는데, 그렇게 죽어버린 나는 다 어디에 묻혀 있는 걸까. 끊임없이 묻어주는 건 누구인 걸까.


보이지 않게 풍화한다.

내가 낡아지는지, 기억이 흩어지는지.

세상은 언제나 밖에서 보기에 나는 날마다 낡아지는 듯 보일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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