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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ug 12. 2019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 다름에 관하여.

그런 날이 있다.

허기진 것도 아닌데, 뱃속 어딘가가 자꾸만 철렁하고 내려앉는 듯한 그런.

 그런 날이면 궁리하곤 한다. 

이 느낌은 무엇일까?

이 느낌은 어디서 왔나?

왜 이런 느낌을 느끼나?


 물론, 이런 궁리에 답이 있을 리 없고, 답이 없는 궁리에는 끝이 없으므로 오래 맴돌게 된다.

그러다, 지치겠지.


 오래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는 것이 곧 이해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적이 있다.

적어도, 아는 것이 많아진다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늘어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는 것은 결국 '내가' 아는 것이지 '너와 나'가 아는 것도, '모두'가 아는 것도, '세상이 다' 아는 것도 아니었음을 자주 잊어버리곤 했으므로, 세상에 오해를 늘리는 일이 잦았다.


 제목을 바꿔 적고 시작해야겠다.

'내가 아는 것'과 '내가 이해하는 것'.

글을 시작하려고 주위를 둘러보다 눈에 들어오는 책들이 있어 꺼내봤다.


이런 책들.

체실 비치에서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체실 비치에서>는 결혼 첫날밤을 치르지 못하고 도망쳐 사라진 여자와 그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영문 모르고 오랜 시간을 보낸 남자의 이야기다.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은 마녀 메데이아, 이아손과 동행하기 위해 자기 손으로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 악녀로 알려진 한 여자의 다른 이야기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 정도다. 

시대도, 세대도, 분위기는 물론 전개 방식도 닮아있지 않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책 두 권을 꺼내봤을 뿐이고 말이다.

그럼에도 두 이야기는 닮은 데가 많다. 


 몰이해 혹은 오해에 관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신경 쓰지 않는, 간과하는 부분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

허구나 픽션이기보다 오히려 현실의 한 단면에 가깝다는 것.


 맥락 없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모르는 게 너무나 많다는 것, 다 알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도 상황이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데 갑갑함을 느낀다. 이해 앞에서 늘, 언제나, 나약해지고 만다.


 조금 이야기의 앞으로 돌아가 보자.

아는 것이 늘어나면 이해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지는 걸까?

사실 그럴 거라고 기대했고, 그렇기를 바랐고, 그럴 수밖에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는 건 어디까지나 아는 것이라는 걸 다시 인정할 수밖에 없음을 느낀다.


 너무 많은 일, 사실, 정보를 '아는 것'으로 만족해왔다.

이해에는, 이해를 위해서는 알기 위해 기울이고 쏟는 노력보다 더 많은, 더 오랜, 더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고도 '이해했다'라고 성급히 믿어버렸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던 건 사실 성급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오만한가.

얼마나 이해를 위해 노력하고 애쓴 후에 '도저히', '도무지'가 따라붙은 '이해'를 말할 수 있었는가 말이다.


 더 웃긴 일도 있다.

이해할 수 없는 게 당연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일들, 부분에 '이해할 수 없다'며 화를 내는 이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거다. 

 나의 이해할 수 없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이해시키려는 시도는 얼마나 무모한가.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일을 어떻게 알 수 있게 말할 수 있는가.


 <체실 비치에서>나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같은 작품이 등장하는 배경이 그런 게 아닐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알겠는데 혼자서는 절대 풀지 못할 거라는 걸 알기에 이야기로 만들어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비슷하게 고민하는 이들에게 결코 그 고민들이 '당신 혼자만의 고민'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려고 말이다.  



비가 내리는 원리를 단순하게 말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충분히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비가 되어 내려온 이 수증기가 어떤 구름에서 쏟아졌는지, 그 구름을 만든 힘은 무엇인지, 수증기들은 어디서 온 건지, 수증기가 빗방울이 되는 순간은 언제였는지, 언제까지 비가 내릴 건지, 이다음 순간 혹은 내일도 비가 내릴지 아닌지. 충분히 알고 있다고 하기에는 세상은 너무 넓다. 


 평생 일기 예보를 배우고 익히고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세계도, 대륙도, 국가도 아닌, 어느 동, 리 날씨도 완전히 알지 못한다. 

 식상한 말이겠지만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라고, 우주라고 한다. 

우리가 얼마나 쉽게 '이해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건지 실감할 수 있는지.


 같은 날 태어나 같은 집에서 자라며 같은 걸 먹고 같은 얘기를 들었어도 다른 사람이 된다고 하는 게 사람인데, 우리는 얼마나 섣불리 '이해'를 논하며 서로에게 날을 세우는 걸까.


 힘이 빠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의 앎이나 타인의 앎에는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이해는 돕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자기 자신의 이해조차 조금 더 나아가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생각하고 애쓰고 있는지 잊어버린 건지. 타인의 이해를 돕는다는 말을 제법 자주 썼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도왔던 건 타인의 앎이지 이해가 아니다.


 이해는 결국 스스로 닿아야 하는 지점, 스스로 얻어내고 받아들여야 하는 과정에 있는 게 아닐까.

이해가 어려운 건 혼자 알았다고 이해가 되는 건 아니라는 거다. 이해에는 반드시 나 외의 존재, 타인 혹은 타자라 부르는 존재가 필요하다. 완전한 이해가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게 어쩌면 당연한데 인간은 자기 자신조차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너무 '이해'라는 말을 남발해온 기분이다.


이해했다, 이해 못하겠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이 말들은 모두 같은 의미다. 

내가 아는 대로, 내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해석한 대로 받아들이기를 끝내겠다는 일종의 선언.

다른 건 그 후의 태도 정도다.

자신의 선언, 결론을 수정할 여지 혹은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

있다면 어느 정도까지 수정할 수 있는가.

그 후의 이야기가 있을 뿐이다.


 '이해'라는 말은 너무 무겁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을 듣기라도 하는 날은 온종일 마음을 짓눌리는 기분이 된다.


<인간실격>에서 요조는 이렇게 묻는다. 

'무구한 신뢰심은 죄인가?'_민음사

 그건 죄인가?


공주시 금강

물밑은 거칠어도 물빛은 고와야 한다.

어린 시절 흔들리기 시작하는 이를 기어코 뽑힐 때까지 흔들었던 것처럼,

흔들리는 사람을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고 쓰러질 때까지, 쓰러지기까지 흔드는 법이기에.

세상이 흔들지 않아도, 스스로, 저절로 쓰러지도록 흔들리기에.


 그런 줄 알면서도 물어봐야 했다.

'이해란 무엇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해 못하겠다 말하는 그건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알고, 무엇을 이해할 수 있나?'


 이렇게 '이해'가 난해하고 복잡한 것임에도 어떻게 세상이 존재하며 유지되는 걸까?


 내 생각에 그건 이해가 아니어도, 이해하지 않아도 충분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 물음은 답을 얻기 위한 것도, 이해를 구하거나 바라는 것도 아니다.


 사랑이 절대적 이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무조건적인 이해도 아니라는 것. 

나름의 조건이 있고 절대적이지도 않지만 사랑은 사랑이어서 사랑이라는 것.


 아는 것과 이해하는 건 종종 착각하기 쉽게 뒤섞이기도 한다. 


자꾸 설명하려 들지 말라고, 분석하고 굳이 이해하려 들 필요 없다는 조언을 종종 듣는다. 

하지만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위해, 이해시키기 위해 필요하기보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해, 때로 불안해지는 나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요하다.

 

 그때마다 떠오르는 책들, 이야기들, 눈에 들어오는 제목들이 마치 비슷한 길을 가면서 닮은 고민을 하던 사람들의 흔적만 같아서 위안이 되는 날이 필요한 거다. 얼마나 똑똑한 사람들은 이런 과정이 필요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영문 모를 불안, 슬픔을 뱃속에 품은 날의 내게는 꼭 필요한 과정이다.


 오히려 모르는 게 많았던 어린 날에 어쩌면 더 많은 걸 이해할 수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는 날이 늘어간다. 더 많이 알게 되면 더욱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거라는 믿음에 사로잡혔던 날도 떠오른다. 안다고 믿기에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함과 '당신은 몰라서 이해할 수 없다'라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던 날의 어리석음도. 


 백지는 백지일 때 쓸모가 크다고 하더니,

내 마음에 여백이 부족해진 모양이구나 한다.

그 많은 이야기와 책과 글자들이 온 마음과 머리를 까맣게 덮어버린 탓인지.


여분의 백지 혹은 하얀 페인트 또는 흰색 펜이 있다면 누군가 빌려줬으면 싶다.

어두운 뒤에야 드러나는 빛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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