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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Sep 09. 2019

내구성

한계를 넘어서면 부서지기 마련이다

태풍이 지나간 밤은 유난히 고요하다.

책방 문을 닫고, 슬쩍슬쩍 뿌리는 비를 맞으며 집에 오는 길에 발견한 게 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적어도 1년도 전부터 미술 학원 간판을 대신했을 작은 현수막이 찢어져 있는 모습.

그 풍경을 지나며 문득 떠올린 단어가 '내구성'이다.

왜, 내구성인가.

내구성에 한계를 맞은 대상이 어떻게 되는지 몹시 명확하게 보여주는 풍경이었으니까.


 내구성은 원래의 상태를 유지하며 오래 견디는 성질을 이르는 말이다. 

내구성이 좋다는 건 오랜 시간이 흘러도, 많이, 여러 차례 사용해도 좀처럼 부서지거나 망가지거나 변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그러니까 폴더폰 시절에는 폴더를 수만 번씩 접었다 펴는 시험을 거쳤다고 한다.

스마트폰이 나온 후에는 버튼을 망가질 때까지 눌러본다거나, 액정이 망가질 때까지 켜 두고 사용하는 시험을 거쳤다. 

 접는 액정이 나온 후에는 그 액정을 몇 번이나 접을 수 있는가를 시험했고, 때로는 실패라는 게 명백해져서 출시가 미뤄지기도 했다.

 내구성이 그렇게 중요한 거다. 

내구성이 나쁜 걸 좋아하는 사람은, 신뢰하는 사람은,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간판을 대신했을 현수막을 다시 생각한다.

만약 태풍이 아니었다면, 현수막은 얼마쯤 더 그 자리에서 간판을 대신할 수 있었으리라.

내구성은 순차적으로, 시간에 비례해서 소모되는 게 아니니까.

때로는 이번 태풍처럼 순식간에 내구성을 넘어서는 힘으로 억지스럽게 부서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간판을 대신하던 현수막의 내구성을 생각하다 엉뚱한 걸 떠올리고 말았다. 

바로 내구성이 다했다고 판단하는 건 언제인가 하는 의문이다.

사실 간판을 대신하던 현수막은 의미를 잃은 지 오래다.

의미도 잃고 쓸모도 없어진 지 오래다.

미술 학원이 사라지면서 현수막 자체의 내구성과 무관하게 쓸모 관점에서 내구성은 끝장났으니까.

태풍은 그저 형식적인 종지부를 찍어준 것에 불과하다.

이미 쓸모 없어진, 본질에서 내구성을 모두 소모한 '그것'을 찢었을 뿐이니까.


 물건의 내구성을 생각하면서 사람의 내구성을 생각하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삶의 주어는 언제나 사람, '나'인 거니까.

스스로는 내구성이 높다고, 크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그건 의지와 기분의 문제일 뿐 현실은 아니다.

오히려 타인이 객관적이라고 한다면 내구성이 낮은 편에 속한다고 봐야 한다.

내구성이 낮은 개인이, 인격이 세상을 오래 견디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순간 최대 내구성을 넘어서는 충격이나 스트레스에 대처할 수 있는 현명함을 얻게 될까.


엄밀히 생각하면 사람에게도 내적인 내구성과 외적인 내구성이라는 구분이 존재한다.

내적인 내구성이 좋은 사람이 있고, 외적인 내구성이 좋은 사람이 있기 마련인 게 당연하다.

드물게 둘 모두 평균보다 높거나 그보다 더 자주 둘 모두 평균보다 낮은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평균보다 낮은 쪽이 더 많을 거라는 생각은 개인적인 판단이라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증명 가능성과 무관하게 어쩐지 세상은 그럴 것만 같다는 생각을 버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적인 내구성이 나쁜 대신에 외적인 내구성이 좋은 편에 속한다.

내적인 내구성이 나쁜 탓에 자주 무너졌다.

화가 메인이고, 짜증은 기본이던 날도 많았다. 

내적인 내구성이 나쁘다는 건 스트레스를 잘 견디지 못한다기보다 잘 풀지 못한다는 거다. 

오히려 잘 참고, 잘 견디고, 잘 쌓아두는 편이라 얼핏 내구성이 좋아 보일 수 있다는 게 특히 위험한 특징이다.

쌓고 담아둔 스트레스는 저절로 풀어지는 법이 없다.

기어코, 언제든, 어떤 모습으로든 터져 나와야만 끝이 나는 거다.


 외적인 내구성이 좋은 편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상처 회복이 빠르고, 좀처럼 앓아눕지 않는다는 거다.

건강에서 신체 건강에 자신이 있는 편이라고 해야겠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는 결코 분리되어 있지 않다.

결국 내적인 내구성이 나쁜 결과 외적인 내구성도 생각보다 빠르게 소모되기 마련이다.

그 한계 지점, 임계점은 반드시 예상보다 빨리 현실이 된다.


 지금도 그렇다는 건 아니다.

정확히는 지금은 조금 덜 그렇다고 얘기해야겠다.

생각하고 실천하고 글 쓰고 읽는 과정은 내적인 내구성을 높이는데 적지 않은 힘을 보탰다.

덕분에 소모된 외적인 내구성도 조금은 회복할 수 있었다.


 내구성은 줄어들기만 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를 하고 넘어가야겠다.

회복 가능한 부분이라는 거다.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회복시킬 것인가는 고민을 요구한다.

대가 없이 얻어지는 건 없으니 당연하게도.


 순차적으로, 혹은 지속적으로 닳아지고 소모되는 내구성은 대처가 가능하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소모가 급증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여력이 없는 상태라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간판을 대신하던 현수막과 다르지 않은 처지가 될 수밖에 없다.

순간 소모량이 최대 내구성을 초과한다면 견딜 수 없는 게 당연하다.

물론 예외가 존재한다.

외적인 내구성과 달리 내적인 내구성은 주변에서 빌리거나, 주변의 도움으로 회복하는 게 가능하다.

최대 내구성을 초과한 상태라고 해도 주변에서 최대 내구를 조금이라도 넘을 만큼의 힘을 보태준다면 견디고 이겨내는 게 가능해진다는 얘기다.


 예를 들면 간판을 대신한 현수막을 누군가 그물망으로 감싸줬다면 찢어지는 일은 없었으리라. 

비록 미술 학원이 사라진 후라 존재 의미가 퇴색되었다 해도 그 자리를 지키는 일, 그 자체가 갖는 의미는 지켜낼 수 있었을 거라는 얘기다. 

 도움을 청한다고 한다.

내적인 내구성에 한계를 느낄 때, 순간순간 최대 내구성을 초과하는 스트레스나 압박을 견디고 있을 때는 크지 않은 힘이라도, 적은 위로라도 견뎌낼 수 있을 만큼의 도움을 줄 수 있다.


 자꾸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하지만 한계를 뛰어넘는다는 건 애초에 논리가 엉망인 소리다. 

뛰어넘을 수 없어서 한계라는 이름을 붙이는 법인데, 뛰어넘을 수 없는 걸 뛰어넘으라고 하면서 뛰어넘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어 짓밟히는 게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상황의 어디에 논리가 있는지.


 한계를 넘어선 순간 무엇이든 부서지기 마련이다. 

오히려 제약에서 자유로워진다거나, 틀을 부수는 편이 수월하기도 하고 논리에도 부합한다.

간판으로써의 의미를 잃은 현수막을 떼어버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면 간판을 대신하던 현수막이 찢어진 걸 보면서 내구성이니 한계니 하면서 쓸데없는데 시간을 쏟지 않아도 됐으리라.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늘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갇힌 탓에 엉뚱한 결론으로 치달았단 얘기다.


그러니 쓸데없는 생각은 여기까지만 하자.

수면을 견디는 내구성을 몽땅 소모해버린 탓에 쏟아지는 졸음을 견디기 힘든 상태에 이르고 말았으니까.

여기서 잠을 쫓으며, 수면과 싸우게 된다면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밤이 깊었으니 잠드는 게 당연하다고, 일찍 자면 일찍 일어난다는 법은 없지만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것보다는 내구성 충전에 여러모로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게 이득이다.


그래서 잔다.

내구성,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닌 축에 속한다.

내구성 그 자체보다 환경과 시스템, 장치와 행위에 더 큰 의미가 있을 테니까.


 한계를 넘을 수 있다는 희망은 밀어 두자.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재촉은 못 들은 체 하자.

한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은 알다시피 광고 카피일 뿐이니까 더 말할 필요 없겠고.

한계가 어떻든 부서지지 말자.

함께 할 때 우린 조금 더 단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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