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 <여자의 빛> 속 남자의 심리를 중심으로
"지금 나는 왼손에 낀 반지에 작은 흠이라도 생길까 걱정하면서도 마치 오래 그 자리에 끼고 지낸 듯 닳아 있기를 바랍니다. 천천히 닳아지면서 닮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여전히 서툰 나의 사랑 고백입니다."
- 서동민
만약 한 번도 오독한 적이 없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그에게 내 모든 이야기, 사실은 이야기가 되지 못한 이야기들을 읽어주기를 부탁하고 싶다. 어쩌면 나 스스로조차 오독했던 나의 진심과 진실에 관해 물어보고 싶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고집 센 독자다. 때로는 억지스럽다고, 무리한 해석이라고 하는 마음의 소리까지 모른 척 물리치며 그 순간에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기상천외한 상상을 풀어내기도 한다. 조금 불안하고 많이 쑥스럽기는 해도 억지스럽고, 무리하며, 가장 기상천외한 상상으로 완성한 해석은 그 책을 특별히 만족스럽게, 오래 기억에 새길 수 있는 힘이 됐다. 마치 일상의 생각, 보통의 감상이라는 무딘 도끼로는 깨뜨리지 못했던 강철을 가르는 광선검처럼.
억지스러운 해석을 내놓기는 하지만 억지로 무리한 해석을 만들지는 않는다. 문득 떠오른 어떤 예감, 느낌을 따라가는 걸 즐기고, 그 느낌이 이끄는 방향의 끝에 있을 어떤 메시지가 그것이라고 쉽게 믿어버리는 편일 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사전을 보면 오독은 '잘못 읽거나 틀리게 읽음'으로 해석되어 있다. 한자를 그대로 풀어서 잘못 읽었다고 적은 거다. 하지만, 한 번 의심해보자. 표준국어사전이 '오독'이라는 단어를 잘못 읽고 있는 건 아닐까? 잠시나마 의심했다면 읽을 준비가 끝났다는 의미다. 오독을 시작하자.
택시에서 내리다가 꾸러미를 안고 가던 여자와 부딪힌 남자가 있다. 그런데 아주 젊지도 그렇게 나이들 지도 않은 여자를 처음 만난 게 분명한 남자의 태도에는 묘한 의도가 섞여 있다. 마치 그 여자가 자신의 인생에 들어와야만 한다는 듯, 이대로 대화 한 번 나누지 못하고, 어떤 인연의 단서도 남기지 못하고 보내버려서는 안 된다는 듯 조바심을 내기도 한다. 얼핏 남자는 난봉꾼이나 아무 여자나 낚아보려는 건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니다. 남자를 잘못 봤다. 남자는 지금 깊은 슬픔에 빠져있으며, 그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누군가를, 바로 조금 전 택시에서 내리다 우연히 부딪힌 여자를 필요로 하고 있는 듯 보인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이상한 느낌을 받으면서도 남자를 참아주고 있다. 하지만 그 인내가 억지스럽기만 한 건 아니다. 이런 장면에 운명이라는 말을 쓰는 게 가능하다면 여자는 남자에게서 어떤 운명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자와 여자의 진실은 이렇다. 남자 이름은 미셸 폴랭, 마흔다섯 살에 항공기 조종사다. 남자에게는 자신의 삶보다 소중한 사람이 있다. 그 여자는 지금, 남자가 다른 여자와의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확실하게 죽어 가고 있다. 남자는 그 사실을 안다. 여자는 남자에게 확약을 받았다. 남자는 여자에게 약속했다. 두 사람은 마치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처럼 약속된 마지막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이다.
여자는 육 개월 전 교통사고로 딸을 잃었다. 마흔셋, 인생을 끝내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다. 여자의 남편은 사고의 충격으로 언어를 잃었다. 여자는 딸을 잃어버린 것도, 너무 아름답지만 너무나 완벽하게 망가진 남편을 견뎌내는 일에도 지쳐있다. 지금 여자에게는 삶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보다 끝내야 하는 이유가 더 크다. 그런데 우연히 부딪힌 이 남자가 방해를 한다. 확실하게 죽어가는 사랑하는 여자를 대신해 삶보다 죽음을 택하려던 여자 앞에 자꾸만 나타나고, 곁에 머물려고 한다.
남자에게도 혼란, 여자에게도 혼란. 오독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여기까지가 소설 <여자의 빛> 줄거리다.
'오독'이라고 적은 이유는 역자의 말에 반대하기 때문이다. 어떤 맥락에서 그렇게 적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남자의 시도를 두고 '처절한 실패기'라 평해야 했을까.
부연하면 남자는 자신의 목숨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기를 선택한 상황을 받아들인다. 최선을 다해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중이다. 이 애쓰는 과정에 '다른 사랑에 성공하기'가 들어있다고는 도저히 믿기 어렵다. 남자가 처절하게 시도하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선택을 받아들이려는 불가능을 이루려는 노력이다. 중요한 건 이 노력이 '그래야만 하는 운명'이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숙명'의 영역에 뿌리 박혀 있다는 점이다. 다른 사람의 사랑으로는 전혀 모자란, 오직 그 여자의 빛에만 반응하고 살찌며 살아갈 힘을 얻는 식물처럼, 남자는 한 여자의 삶을 사랑한 것을 넘어 죽음까지 사랑하기 위해 애쓰는 거다.
'사랑해야 한다'는 말이 마치 세상에 태어난 유일한 이유인 것처럼, 오직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살아가고, 죽어가는 것만 같다.
비록 세상의 눈에 남자의 태도가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으로 비치더라도.
그를 잘 아는 사람들마저 그를 향해 미쳤다고 소리치더라도.
오독이라고, 지독한 오독이라고 얘기해도 사랑하는 사람과 나눈 마지막 약속을 지키려고 애쓰는 남자를 '처절히 실패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프랑스어를 모른다. 프랑스어를 알고, 원어의 의미와 뉘앙스를 더 잘 알고 있을 번역자의 해석을 부정하면서까지 오독을 고집하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이다. 내 기분이 도무지 내키지 않아서다.
내게 오독이란 해석의 문제보다 기분 문제일 때가 많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프랑스어로 된 소설을 번역할 정도의 수준인 사람이 오독하고 있는 거라고 주장한다면 들어줄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기분의 문제라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기분의 문제라면 "프랑스어 본문에 쓰인 단어에는 그런 의미가 없다"고 원리, 원칙에 맞게 주장해도 부정해줄 수 있다. 기분이란 건 원리나 원칙의 문제에만 얽매이지 않는다고 믿고 있으니 말이다.
분명 오독이 치명적인 잘못이 될 때도 많다. 절대 오독해서는 안 되는 순간도 있다고 믿는다. 오독한 거라고 얘기해주는 이들의 목소리, 의견에 귀 기울여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내 마음, 내 기분이 달려 있는 거라면, 그래서 누구에게도 독이 되지 않는 거라면, 마음껏 오독해도 좋은 게 아닐까.
진시황이 그토록 찾던, 실제로도 찾았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불로초는 사실 맹독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인간의 몸에 치명적인 성분을 갖고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진시황이 죽음에 이른 이유가 그 이전에 복용한 약초들의 독성에 불로초의 독성이 더해진 충격을 견디지 못한 탓이라는 해석이다. 이 추측,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얘기를 하는 건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어줄 수 있는 불로초가 때로는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치명적인 독일 수도 있는 불로초지만 인간을 불로불사의 존재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는 걸 재확인하고 싶어서다.
적당히, 잘 활용한다면 독이 약이 되는 것처럼, 오독도 득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적당히, 잘 활용한다면 오독은 읽기의 즐거움을 두 배, 세 배, 몇 배나 키워준다.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을 수 있고, 전혀 다른 해석이 이야기의 이해를 도와주기도 한다. 오독하지 않았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새로운 관점을 발견하는 열쇠가 되는 거다.
오독이란 불로초다. 그게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상황과 사람이 정한다. 부디 약이 되는, 득이 되는 오독을 즐기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