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를 주장하기 시작하다

뺏기면 울 줄 아는 나이 173일

by 가가책방

2020년 12월 16일, 아기가 태어나고 177일이 됐다.

요즘처럼 매일매일이 세상 처음 경험하는 일로 가득하던 때가 언제였는지 까마득해서 기억나지 않는다. 덕분에 매 순간 좌충우돌. 사소한 일로 다투는 일이 잦아지고, 알고 보면 별 것 아닌 상황에 노심초사하는 게 일상이다. 어떤 의미로는 살아 있음을 가장 절실하게 실감하는 순간의 연속이고, 다른 의미로는 모든 순간이 '중대한 시험'만 같아서 부담을 떨치기 힘든 혼란의 연속이다.

부모가 어떻게 느끼든 아기는 자란다.

눈도 못 뜨던 아기가 이제는 또렷이 시선을 마주하고, 가누지 못하던 고개를 꼿꼿이 하고, 몸을 돌리는가 싶더니 뒤집기도 거뜬히 하고, 조금만 환경을 만들어주면 혼자 앉아 십여 분은 논다. 아기는 훌쩍훌쩍 자라는데 나는 여전히 어제처럼, 그제처럼 걱정하고 고민한다.

아기가 자라는 속도를 따라가고 싶은 마음이다. 아기와 함께 자라고 싶은 마음이다.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았다. 적고, 기록하고 싶은 사건들, 생각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로 하루하루 미루다 거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 잊어버리고 잃어버려서 아쉬운 사람이 나 하나라면 조금 더 게으를 수 있을 텐데, 우리가, 그리고 아이가 조금 더 자란 후에 함께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더 많아졌으면 하는 욕심 때문에 더는 미루기가 어렵다. 함께 나눌 수 있는 오늘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 오늘에라도 적기 시작하는 이유다.


2020년 12월 12일.

아기 이유식 시작이다. 쌀가루를 물에 녹여 끓인 '미음'이 아기가 우유 다음으로 맛보는 음식이다. 사실 음식이라고 하기엔 여러 가지가 부족하지만 어디까지나 우유 외의 무엇을 입안에 넣어보는 경험을 시작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으니 음식이라고 해두자.

이게 무슨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우리는 미음을 떠먹이기 전에 사진을 찍을 준비부터 한다. 아기는 벌써 한참 전부터 카메라를 의식하기 시작했는데, 눈 앞의 낯선 것보다 카메라에 집중하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도 한다. 그러나 역시 쓸 데 없는 걱정. 아기는 당연하다는 듯 입을 벌려 새로운 세계를 연다.

'입맛'.

아마도 평생 화두가 될 수도 있을 신세계의 이름이다.


아기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마치 '이게 뭐지?' 하는 표정이다. 그러더니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입에 들어간 열 중 아홉을 흘린다. 입은 한가한데 숟가락만 바쁘다. 이유식을 하는 목적은 '배불리 먹이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먹고 소화하는 연습'에 있다고 한다. 첫 날인만큼 세상에 마실거리 외에 다른 먹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데 의미를 둔다.

생각보다 잘 먹는다. 아니, 먹으려고 한다. 숟가락이 멀어졌다 가까워질 때면 입을 벌리고, 숟가락이 입에 들어가면 입을 닫았다가, 쩝쩝거리듯 앙다물은 입 속에서 자꾸만 혀를 움직인다. 그때마다 침이 흐르는 걸 막을 수 없다.


정말 중요한 사건은 역사적인 첫 의식을 마치고 난 후에 일어난다.

그릇을 좋아하는 듯 보여서 손에 쥐여준다. 당연한 수순으로 손에 든 건 입으로 간다. 그렇게 한참을 놀다 얼마나 지났을까, 앉혀둔 아기를 일으켜 안기 위해 평소처럼 손에 든 그릇을 치우려고 할 때다. 손에 쥐고 있던 그릇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손을 떠나자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이 울음은 어딘가 특별하다. 평소 듣던 그 어떤 순간의 울음소리와 그 톤이나 리듬이 다르다. 말 그대로 처음 듣는 소리를 낸다. 자연스럽게 서러운 표정을 지으며 눈물 흘리고 운다. 뭔가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느끼는가 보다.


우리는 아기가 자랐다고 느낀다.

소유를 주장한다고 느낀다.

빼앗김을 억울해한다고 생각한다.

빼앗기면 울 줄 아는 나이, 173일이라는 걸 새긴다.


그날 찍은 사진과 오늘 쓴 글이 자람일기 첫 장이 된다.


이 밤, 아기는 잘 잔다.

하루만큼 더 자라서 오늘은 178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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