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법을 잊어버린 어른들에게
예전부터 궁금한 게 있다.
"아기들은 왜 그렇게 잘 웃을까?", 아기들의 웃음에 대한 미스터리는 오랜 시간 풀리지 않았다.
뒤잇는 생각들은, 왜 웃을까?, 뭐가 그렇게 좋을까?, 어디가 우스운 걸까? 하는 식이다.
오래 보아야 예쁘다고 했던가.
가까이서, 오래 보니 알게 되는 것.
알게 되는 것 같은 게 있어 적어본다.
오늘은 아기들의 웃음에 대한 생각이다.
어제 아침이다.
평소보다 일찍 잠에서 깬 아기를 유모차에 눕혀두고 젖병을 씻었다. 가만히 두면 심심할까 봐 발로 유모차를 밀고 당기기도 하고, 종종 돌아보며 눈을 깜빡이거나 고개를 흔들어 주는 일도 잊지 않았다. 아기는 평소처럼 자꾸 웃었다. 눈이 마주쳐도 웃고, 눈을 감아도 웃고, 고개를 흔들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어느 순간이었을까 문득 아기 얼굴이 웃음으로 변하기 직전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생각해보면 평소에도 자주 봐 온 표정인데 그 순간에 특히 의미 깊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아기는 마냥 잘 웃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궁금하게 생각할 부분은 '왜 그렇게 잘 웃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웃게 되는 걸까'여야 한다.
순간이지만 웃음이 되기 직전의 아기 표정은 아주 잠깐 어리둥절해 보였으니까.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고작 눈 앞에서 누군가가 눈을 깜빡인다고 웃을 이유가 어디 있겠나.
울 수도 있고, 찡그릴 수도 있고, 고개를 돌릴 수도 있는데 왜 굳이 웃을 필요가 있겠느냔 말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아기는 웃기로 마음먹은 듯 활짝 웃었다.
크게 소리도 질렀다. 그야말로 자지러지게 웃는 웃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그렇게 웃는 자신이 우스운지 또 웃었다. 그렇게 웃음이 웃음으로 이어지는 상황을 만들어 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아기는 되도록 웃으려고 하는 편인 게 아닐까?"
아직 감정이 세분화되기 전이라고 하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는 만큼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라고 얘기해주는 사람도 있을 거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었다.
졸음이 쏟아지는데 잠드는 법을 몰라서 울음을 우는 아기처럼.
보통 낯가림으로 혼란스러울 때 '운다'는 태도를 선택하듯이 말이다. 선택이라기보다 본능에 가까운.
웃음과 울음 사이를 오가던 생각이 문득 묘한 쪽으로 튀어서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할 법한 잘 웃는 사람을 떠올리게 됐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웃던 캔디 같은 인물들.
단순히 곱게 자랐다거나 긍정적인 성격이라는 말로 표현해버리기 아까운 희귀한 사람들. 실존 자체로도 화석처럼 취급될 그 사람들은 어떻게 흔한 웃음을 지킬 수 있었을까.
나는 잘 웃지 않는다.
잘 웃지 않는다기보다 별로 웃을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 그게 그거다. 결국 웃음에서 '필요'를 찾는 허당이란 얘기다.
좋아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면 좋아진다는 말을 억지 논리라고 말하는 편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으니 행복하다는 말도 설득력이 있다. 별 것 아닌 일에 웃는 아기를 보면 덩달아 웃게 되는 것처럼 웃음에는 그 자체로 웃음을 부르는 힘이 있는 게 아닐까.
어떤 이유에서든 아기는 되도록 웃으려고 하는 듯 보였다.
울음보다 웃음이 낫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종종 이런 말을 한다.
"아기의 웃음과 울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그래서 잠시 전까지 웃던 아기가 갑자기 울 수도 있고, 마냥 좋아서 웃던 아기의 웃음이 어느 순간 울음이 되어 버린 걸 깨닫고 당황하게 되기도 하는 일이 흔하다고. 그만큼 웃음과 울음의 경계가 희미한 아기가 늘 웃음을 웃으려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흔하다고, 쉽다고 생각하던 아기 웃음이 갑자기 귀하고 대단하게 느껴지던 순간이다.
아기는 잘 운다.
잘 웃는 만큼 잘 운다.
어른의 울음보다 몇 배는 서럽게 느낄 만큼 서럽고 서럽게 운다.
울음에 감정을 싣는 재능을 타고나기라도 한 것처럼 우는 소리를 듣게 되면 마음부터 약해진다.
웃음은 울음에 비해 감정의 농도는 옅다. 하지만 듣기 좋아서 자꾸 듣고 싶어 지게 한다.
아기 앞에서는 어른이 광대가 되는 법이라는 말이 왜 설득력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되는 이유다.
아기는 왜 잘 웃을까.
지금의 내가 내린 결론은 아기가 되도록 웃는 걸 택하기 때문이라는 거다. 아기도 웃음을 택하고, 웃기 위해 노력한다는 거다.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아갈수록 웃음이 줄어드는 건 웃지 못하는 이유가 늘기 때문일 거다. 웃을 일보다 울 일이 많고, 억울하기도 하고, 뭔가 슬프면서 불안하기도 한 일이 얼마나 많은가. 해맑게 웃고 다니는 어른을 정신 멀쩡하다고 믿어줄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래서 더더욱 진지하고, 근엄해지려고 하다 보니 웃음이 더 귀해지는 게 아닐까.
되도록 웃음을 택해야겠다. 가뜩이나 까칠하고 날카로운 성격에 불만도 많고 지적하고 싶은 일도 잦은 편이라 웃을 일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얼마든지 더 웃을 일, 웃을 수 있는 순간이 많이 있다.
잘 웃는 아기를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난다. 웃고 있으면 왠지 즐겁다. 그렇게 즐겁다 보면 행복하다고 느끼게 된다. 단순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되는 이야기다.
웃는 법을 잃어버린 어른들 역시 한 때는 더 많이 웃던 날이 있었을 거다.
더 흔하게 웃고, 더 흔하게 즐겁던 날을 살았을 거다,
다만 지금 잠시 웃음을 잃었을 뿐, 웃는 법을 잊었을 뿐인 거다.
2월도 멀지 않다. 1월이 가기 전에 조금 더 웃어보자. 울음이나 찡그림보다 웃는 얼굴을 선택해 보자.
몽테뉴였던가, 천국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한 사람이.
천국이 있다고 믿고 좋은 삶을 살았다면 천국이 없어도 손해가 없고, 천국이 있다면 더 좋지만 천국이 없다고 좋지 않게 살았다면 천국이 없어도 좋지 않은 삶이 었으니 손해고, 천국이 있다면 좋지 않은 삶을 살아온 결과 천국을 즐길 수 없으니 더 손해라고 말이다.
웃어서 복이 오거나, 웃어서 행복하다거나 웃어서 좋다는 게 사실이 아니면 어떤가 손해가 없는 것을. 오히려 웃는다고 복이 오는 게 아니니 웃지 않고, 웃는다고 행복해지는 게 아니니 웃지 않고, 웃는다고 좋아질 일 없으니 웃지 않는 게 큰 손해인 걸.
나를 위하자. 나를 위해 웃어보자. 그렇다고 나만을 위하거나 나만을 위해 웃지는 말고, 그 웃음이 조금 더 널리, 멀리 퍼질 수 있게 그렇게 웃으며 살아보자.
아기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