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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pr 15. 2021

우울과 다투지 말지어다

어느 보통 사람의 우울에 관한 고찰

우울은 실재하지만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으므로 싸울 수 없다. 억지로 싸워본다 해도 이길 수 없다. 싸움에는 힘이 드는 법이고, 싸움을 계속하다 보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므로 결국 우울과 싸우려던 사람이 먼저 쓰러진다. 우울과의 싸움에 적극적으로, 전력으로 임할수록 스스로를 파괴하는 순간에 더 빨리 가까워진다. 

 더 우울한 건 그런 우울에서 벗어나는 게 결코 간단하지 않다는 거다. 실체는 없는 주제에 늪처럼 한없이, 끝없는 바닥으로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우울이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의 경험과 견문을 통해 정의한 우울의 정체다. 오래전 딱 한 번 찾아갔던 정신과에서 두 시간은 족히 걸린 문제풀이 끝에 받았던 '넌 너무 예민하게 구는 게 문제야'라는 진단과 '이 약 하나 먹으면 상당 부분의 문제가 호전되거나 해결될 거야'라는 처방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의사의 진단과 처방을 지금의 결론에서 재해석하면 우울과 직접 싸우려들지 말고 약과 우울이 싸우게 하라는 얘기였을 거다. 직접 싸우느라 힘 빼지 말고 삶을 즐기는데 힘을 쏟으라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추측해보지만 사실 여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 어디까지나 '나의 경우'일 뿐이고, '나의 선택'이었으며, '나의 방법'에 불과하므로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 이렇게 글로 써서 남길 정도의 가치가 있는지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에는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기록조차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를 얻기도 하는 법이다. 그런 마음에서, 아무 의미 없는 기록은 아닐 거라는 믿음으로 조금 더 적어본다.


 잘 기억나지 않지만 한국인 열 명 중 상당수가 우울증을 경험해봤으며 그중 또 많은 수가 일상적으로 우울함을 느끼고 있고, 또 그중 적지 않은 이들이 극단적인 충동에 시달린다는 통계 비슷한 걸 여러 번 봤다. 혹시라도 상습적인 우울감에 시달리는 이가 있어 '나 혼자 그런 건 아니래'라는 얘기에 '위로'를 느낄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우울을 경험'하고 있는 자신을 두고 다른 누군가가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것 없는 우울을 경험'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더 우울해질 것만 같다. 사람마다 다 다른 우울의 근원이 있을 텐데 같은 약을 처방받는 걸로 해결하려는 진단과 처방을 지속적으로 경험한다면 그 경험이 또 다른 우울의 이유가 될 테니 말이다. 

 

 함부로 위로하지 않는 이유도 그것이다. 나는 감히 위로할 수 있을 거라고 믿을 수가 없을 때가 많다.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지 모른다는 것도 위로할 수 없게 한다. 그런 순간, 그런 눈치를 알아차렸다고 믿는다고 해도 하고 싶은 많은 말을 삼키고 묻어두는 이유도 같다. 차마 흔히 하듯 '힘내'라고 '괜찮을 거'라고 할 수가 없다. 공감능력이 떨어져도 어쩔 수가 없다. 나는 그런 위로의 말을 듣는 게 못 견디게 싫었으므로, 그 말이 오히려 또 다른 우울을 부추기는 이유가 되는 날도 많았으므로, 나조차 그럴 수는 없다. 


 우울에 관해 다른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다. 학문적으로나 의학적으로는 더 많이,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당사자들이고, 다만 헤어날 수 없어 그 자리에 머물고 있는 것일 테니까. 내 경우는 분명 비교적 가벼운 우울이었겠는데, 엉뚱하게도 고전을 읽고, 북클럽에 나가면서 숨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 

 종종 책방을 취해하러 온 방송 인터뷰에 얘기하는 것인데 고전이란 게 지금의 나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이야기 같아서 읽다 보면 책을 읽듯이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 기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는 거다. 타인이 '그건 별 거 아니야'라고 말하면 분노하게 되지만 스스로 돌아보니 '별 것 아니었구나' 하면 안심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소설을 읽다 보면 주인공이나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 경험이 마치 여러 번의 삶을 살아보는 것처럼 마음을 단단하거나 부드럽게 하는 거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누군가는 유사한 경험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 적는다. 이 과정들은 현재 진행형이다. 여전히 힘겨운 날은 이어지고, '이건 또 어김없이 찾아오는 우울이구나'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경험한 누군가의 내면 속 우울과 그들의 태도, 그들을 지켜보는 나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상당 부분이 해소되는 걸 느끼기도 한다. 


 보통 사람인 나는 우울과 싸워 이길 만큼 힘이 세지 않다. 물론 마음의 힘 얘기인데, 아마 누구도 홀로 싸워 이길 수 있을 만큼 힘이 세지는 않을 것 같다.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운 추측인데, 아무리 인기가 많은 대스타도, 아무리 강한 무술가도, 아무리 많은 걸 아는 지식인도 우울과의 싸움에 승리했다고, 영원히 이겨냈다고 하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무수하지만 말이다.


 시작부터 끝내지 못할 이야기라는 걸 알고 시작한 글이라 느닷없이 끝내기로 한다. 앞으로 또 어떻게 변할지, 어떻게 받아들이고, 생각하게 될지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는 게 우울인 거니까. 

 즐거울 수가 없어서 우울하다는 건 안다. 즐거운 줄 알았는데 우울했구나 하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도 늘, 언제나, 항상 우울할 수는 없다고 믿고 있다. 

 

 또 별 의미 없는 말이긴 한데,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기도 한데, 우울에 너무 골몰하지 않기로 하자. 우울과 가장 격렬하게 다투는 방법이 우울에 골몰하는 것 아닐까. 왜 우울할까, 왜 우울하지 않을 수 없을까, 왜 우울해야 하는 걸까, 왜 우울, 처럼 우울에 대해 묻는 걸 잠시 멈춰보자.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기가 참 어려우면서 대단히 쉽다고 느낀다. 이렇게 잘 모르는 우울이란 것에 대해 이만큼, 간단히 적어낼 수 있는 걸 보면 모르는 것만큼 무서운 게 별로 없구나. 그러나 만족하기로 하자. 잘 모르면서 잘도 이만큼 썼구나. 기막힌 일이다.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런가 보다 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품어본다.


- G -


- 고양이의 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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