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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l 19. 2021

나는 왜 쓰는가

끝이 없을 줄 알면서 이 질문에 다시 답하다

나는 왜 쓰는 걸까.


나를 쓰게 만드는 계기는 크게 둘이다. 

첫째는 쓰고 싶어서다. 그 글이 어떻든 쓰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글은 어떤 결말로 이어지든 즐거움이 된다. 아마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프로건 아마추어건, 아무것도 아니건 쓰는 동안 즐겁거나, 쓰고 난 후에도 즐겁기를 바랄 거라고 믿는다.

둘째는 써야 할 것 같아서다. 사실 이런 글은 좀 무모할 만큼 자신만만하게 시작하곤 하는데, 그 결말은 대부분 유보적이거나 흐지부지해서 아무래도 좋은 얘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읽는 이가 알아차리건 아니건 쓴 사람만 아는 그런 부끄러움을 남기게 되는 거다.


 자, 그럼 지금 쓰는 이 글은 둘 중 어느 쪽에 속할까.

미안한 얘기지만 둘 다 아니면서 둘 다에 속한다. 쓰고 싶은 글이지만 쓰고 싶지 않은 얘기고, 써야 할 것 같은 얘기지만 써도 소용없을 글이라 서다. 한 마디로 혹시라도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 있다면, 그다음은 읽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은, 별 쓸데없는 얘기를 할 거라는 예고다.


 인간은 약하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도 터무니없는 이유로 무너지고 부서진다. 이기적인 인간일수록 이타적인 일에 쉽게 무너진다. 인간은 크거나 작거나 결국 이기적이므로 이타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무너질 이유가 많을 거라는 이야기다. 별 의미 없이 그냥 말도 안 되는 말이다. 앞서 적었듯이 여기부터는 더더욱 읽지 않아도 좋다.


 글을 쓴다는 건 기본적으로 생각을 정리하는 과정을 겪는다는 의미다. 과거의 생각, 아득히 먼 과거의 생각, 오래 잊고 지냈던 생각까지 모두 끄집어낼 수 있게 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어떤 사건, 사람, 이야기를 계기로 묻어두고 덮어두었던 생각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혼란을 겪을 때도 있다. 글을 계속 써나간다는 건 그런 예상하지 못한 상황들에 조금 더 차분히 대처할 수 있게 연습할 시간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만 하던 경험이 의외의 해결책 혹은 사고의 단서가 되는 경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사고의 공백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은 공백을 두려워하므로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공백을 메우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는데, 글을 쓰는 동안 떠올리거나, 그랬으면 하거나, 그렇지 않았거나 하는 소망을 실현하게 된다. 절대 그럴 리 없거나, 분명히 그런, 기억은 이럴 때 생겨난다. 자신이 상상하거나 지어낸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 글로 남은 기록을 더 믿기를 선택하는 거다. 


 그렇게 어떤 인간들은 거짓말쟁이가 된다.

도대체 진실을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애초에 진실이란 무엇인가.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다 보면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은 기억들이 유난히 또렷이 떠오른다. 반복하지 않기 위한 방법으로 강박적으로 생각하기를 택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전의 내가 그랬다. 실수하고 싶지 않은 일에 실수를 했을 때, 스스로에게 무척 엄하게 굴었다. 왜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무수히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들에게도 엄하게 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생각을 하지 않느냐고 묻거나, 그 정도는 당연히 생각한다고 얘기하는 일이 잦았다. 이런 태도는 분쟁, 다툼의 이유가 된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실수하는 편이 낫다. 그렇다고 한다. 그렇다.


 그래서, 지금 내가 쓰는 건 너무 오래 글을 쉬고 있어서다. 이쯤에서는 뭐든 한 번 써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다. 특별히 쓸 것도 없으면서 수천 자는 남길 수 있는 기능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별 것 없다. 쓰는 것, 그 정도야 뭐.


 너무 오래 글을 쓰지 않고 지내다 보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어딨지?"


 웃긴 일이지만 자주 있는 일이다. 오래 글을 쉬고 있으면 나를 잃어버렸거나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내 생각이 없이, 생각을 잃어버리면서, 생각이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린 상태로, 숨을 쉬지만 마치 죽은 것처럼 생기 없이 느낀다. 그래서 지금 쓴다. 숨은 쉬어야 하니까. 살아있음을 실감해야 하니까.


 쓴다는 건 살아있다는 거다.

내가 여기 살아있으므로 이 글을 남길 수 있음을 확인하는 거다.

세상이 아니라,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아직 죽지 않았다고 알리는 거다.


 생존의 증명, 그것이 오늘 내가 쓰는 이유다.

나는 여기 있다.

숨 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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