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Apr 16. 2021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변명

소설 <달까지 가자>,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문

달까지 가자/장류진/창비

마침내 끝까지 읽어냈다. 

사실 읽어냈다고 적기엔 너무 수월히 읽히는 작품이다. 비유하자면 당장이라도 전쟁이 날 것처럼 긴장된 상태로 들끓는 언론의 속보와 단독 기사들의 시시한 결말을 다 알게 된 후에 새삼 접하게 되는 과거 어느 날의 신문을 읽는 기분에 가깝달까. 

 부드럽게 적으면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고, 삐딱해지자면 너무 그러한 전개의 연속이랄까.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겨 읽기를 마치면서 어떤 얘기를 할까, 어떻게 말하고 싶은 걸까를 생각하다가 "아, 나는 완전한 꼰대가 된 거구나."하고 느꼈다. "왜 이렇지 않고, 저러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내내 매달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랬던 것'과 '그래야 하는 것'들 속에 사는 사람이 꼰대가 아닌 무엇인가.


 표지를 다시 들여다보다가 '하이퍼리얼리즘'이라는 단어를 발견했다. 견문이 짧아 잘 알지 못하는 영역이라 찾아보다가 '극단적인 사실적 묘사'와 '현실 자체를 해석하고 그려낼 적절한 방법을 상실한 현대 예술의 무기력을 반영한 측면'이라는 표현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니까 소설을 읽으면서, 소설을 읽고 난 후에 내가 떠올린 생각들은 지극히 작가가 떠올리도록 의도한 바에 이끌린 결과였던 셈이다.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사실적인 전개는 독자에게 '현실을 해석하고 그려낼 방법이 없음'을 전제로 했을 테니, 그야말로 제대로 걸려든 게 아니고 무엇인가.


 그럼에도 아쉬움을 토로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런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달까지 가자>를 읽는 기분이 마치 웹소설을 읽는 듯했다고.


 웹소설 중에 게임을 기본 세계관으로 전개되는 부류가 있다. 이 소설들에 지리멸렬할 정도로 꿋꿋이 등장하는 부분이 주인공이나 인물들이 새로 얻은 능력이나 기술을 설명하는 부분과 경험치 얼마를 획득했다는 부분과 레벨이 몇이 됐다는 부분이다. 분명 이야기 전개에 꼭 필요한 부분이긴 한데, 조금 흥미를 붙일 만하면 불쑥불쑥 등장하는 장황한 설명이 긴장감을 떨어뜨려서 전체의 흥미까지 떨어지게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달까지 가자>에도 그런 부분이 있다. 1 이더리움이 얼마가 됐다는 언급인데, 소설 전개에 꼭 필요한 부분인 건 맞는데 연속으로 두세 번 얼마가 됐다는 얘기가 이어질 때면 책을 덮고 싶어 지기도 했다. 분명 소설 속 그 시점, 그 현실을 살았던 누군가에게는 피 마르는 현실이었을 그 순간이 멀찍이 떨어져서 관전할 뿐인 내게는 지루함이었다는 거다. 그랬다는 얘기다.


 어떤 현명한 평론가처럼 좋은 것만을 얘기하고 적기에도 부족하기에 굳이 나쁘거나 부족하거나 바라는 부분을 적는 걸 지양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이래서 스스로도 꼰대구나 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거였다.


 한국 소설을 읽은 게 참 오랜만이다. 특히 젊은 작가의 장편을 읽은 건 더 오랜만이다. 예전에 한국문학을 함께 읽던 독서모임 이후 거의 처음인 듯도 하다. 새삼 혼자서는 지금의 한국문학을 읽어낼 힘이 없음을 느낀다. 핍진한 걸 견디지 못하는 성격 탓인데, 다 알고 있는 걸 모른 척하면서 읽는 것 같은 기분이라서 그렇다. 마치 소설을 읽는 과정이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다 잘 될 거라고, 괜찮을 거라고, 끝까지 버티자고, 소위 '존버'하자고 등을 떠미는 것 같아서 숨이 막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함께 읽고 풀어줄 이들이 필요하다. 꼰대가 되어버린 메마른 정신을 부술 수 있는 크고 작은 자극, 솔직함이 필요하다. 사람이 사람을 대면하기 어려워진 이 시대에 새삼 사람이 그리워졌다.


 다른 세상을 사는 거라고 생각한다. 저마다가 다 다른 삶을 사는 거라고. 다 다른 걸 읽고, 다 다르게 읽는다. 그게 리얼월드.


일부러 해설과 작가의 말을 남겨두고 감상을 적었다. 잘 모를 때, 무엇이, 어디까지 의도고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할 때 쓰는 감상이 진정 날것의 가치를 지닌다 믿기에. 


  소설을 읽으며 2017년 투자사 대표님이 이더리움을 소개하며 했던 얘기가 떠올랐고, 뉴스와 현실에서 난무하던 기대와 불안, 규제와 가능성에 대해 논하던 얘기들을 돌아봤고, 지금도 여전히 매 순간 기뻐하거나 절망하고 있을 누군가와, '이것이 정말 마지막 기회의 땅'이라고 간절히 믿었고 믿고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거의 모든 현실이었던 것들에 대해서.


 소설은 2018년에서 끝나지만 우리는 현실을, 2021년을 산다. 지금의 우리는 기대할 수 있을 뿐 확신할 수 없다. 소설을 통해 우리는 과거에 대해서는 한 없이 신에 가까워질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절대적으로 인간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한다. 결국 우리는 버티거나 그만두거나 다른 길을 모색하면서 자기 삶을 살 수 있을 뿐이다.

 소설은 그 모색의 과정에 보탤 수 있는 하나의 참고 사항으로만 기능해도 충분한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은 하는 게 아니라 받는 게 중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