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봄호를 읽다가
몇 년인가, 드문드문 창작과비평을 구독하다 말다를 반복 중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문학잡지 몇 개쯤은 구독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허세 비슷한 감정과 늘 한국문학에 소홀한 자신에 대한 부채감이 합작한 결과이기도 하다.
민음사의 릿터는 2년인가 구독을 하다 결국 그만두었다. 악스트는 창간호를 받고는 그만뒀다. 문학동네 계간지도 몇 권인가 갖고 있지만 그 역시 시들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다 어느 변덕스러운 날에 다시 구독할 수도 있는 존재들. 내게 문학잡지의 의미는 그 정도다 더할 것도 더할 것도 없는.
봄의 끝자락이라기엔 너무 더워서 벌써 여름인 게 아닌가 싶은 날이다. 그럼에도 유리 너머 보이는 분홍꽃이 '아직 봄 안 갔다'고 말하는 듯 한, 겨우 봄이랄까 하는 그런 날 창작과비평 봄호를 꺼낸 건 순전히 우연이다. 몇 계절을 보낸 후에야 몇 페이지 들춰보는 게으름이 습관이 된 지 오래니까.
문득, 20세기 말부터 염려하던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의 끝', 그러니까 봄과 가을 없이 여름과 겨울이 무한히 반복되는 세계의 도래가 현실이 되기까지 멀지 않은 게 아닐까 생각한다. 유래 없이 일찍 피고 져버린 벚꽃과 4월이 가기도 전에 수은주 30도에 육박하는 날씨를 보면 그리 먼 미래 같지도 않다. 어떤 계절이 사라진 우리나라. 여름과 겨울이 무한히 반복되는 혹독하고 지독할 게 뻔한 계절을 견디는 우리 삶.
그 세상에도 계간지가 존재할까.
영어로 쓴 걸 보면 Quarterly니까 분기로 봄호 대신 1분기호, 여름호 대신 2분기호, 가을 대신 3분기호, 겨울 대신 4분기호라고 쓸 수도 있겠네. 하지만 봄과 가을이 없으니 앞반년 호, 뒤반년 호나 상반기호, 하반기호가 될 수도 있겠다. 그런 미래를 상상해봤다.
이렇게 상상해보면 계절이 먼저 사라질지 계간이 먼저 사라질지라고 적은 제목은 엉터리다. 둘은 따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인 건데, 계절이 사라지면 계간도 이름을 달리 할테니 말이다. 하지만 또 다르게 생각해보면 계절보다 먼저 계간지가 사라지는 미래는 분명히 존재할 가능성이 남아있다.
창비가 반 세기 가까운 49년이나 계간지를 내고 있다지만 당장 50권이 될 내년을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계간 창작과비평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하는 인사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있을 법한 미래는 아니지만 있을 수 있는 미래다. 상상하는 보람이 있다.
계절 얘기 말고 다른 얘기로 계간지가 사라지는 미래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계간지란 게 도무지 보편적 독자를 보유하고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에, 상징적 의미가 조금이라도 빛바랜다면 언제든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그럴 리 없을 거라고 믿는다. 의외로 큰 자부심과 의미를 부여하는 발행인이 존재하는 한 외부이 조건이나 요건과 무관하게 계속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믿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
봄이 가는 게 특별히 아쉬운 건 아니지만 내년에도 봄이 다녀갈까를 염려하는 마음은 있다. 매년 가속되는 온난화에 미국이 기후협정 테이블로 돌아왔다는 소식에도 시큰둥하다. 그렇게 간단히 나아질까. 문예지의 세계는 겨울이지 싶다. 그 어느 해보다 혹독한 겨울일 것만 같다. 의외로 매출과 영업이익에서 선방하거나 좋은 결과를 만들어낸 출판사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런 결과가 독서 시장, 책 시장에 따스한 봄을 약속하는 건 아니니까.
계간지건 격월간이건 나는 문예지를 챙겨 보는 소위 문청(문학청년)이 아니다. 그저 변덕과 습관으로 드문드문 읽거나 말거나 하는 보통의 독자일 뿐이다. 그래도 전통과 도전정신에 빛나는 문예지들이 간단히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계절이 사라져서 더는 봄호나 가을호라는 말을 쓸 수 없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여전히 봄과 가을을 그릴 수 있게 봄호와 가을호를 펴줬으면 좋겠다. 지금부터라도 조금 덜 드물게 챙겨볼 테니, 부디, 계절보다 오래 계간으로 존재해주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