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짝깜짝 놀라는 하루하루
어제오늘은 아마도 예년만큼 춥다. '겨울이구나' 실감하게 하는 정도로 춥지만 아직 한 겨울은 아니구나 하고 하루 중 몇 번은 안도하게 하는 날들. 무난하고 평범한 겨울이다.
지금의 무난하고 평범한 겨울을 지난 주말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다. 11월 말에 가까워지면서 오히려 점점 따뜻해져서 다시 가을 옷차림으로 돌아가는 날도 있었고 아이와 제민천을 산책하거나 포크레인 작업 현장을 찾아다니는 날도 많아졌다. 수능 한파도 없었고, 이대로 따뜻한 겨울이 될지도 모른다는 이상기후로 큰 난리를 일으킬 실없는 생각도 해봤다. 그런 생각, 상상을 모두 뒤집듯, 2022년 겨울에게도 다 계획이 있었다는 듯 그날이 왔다. 11월 30일 밤에 있던 일이다.
11월 29일, 날이 조금 차가워졌다. 금세 눈이 내리거나 얼음이 얼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입동을 한참 지난 후에 겨우 겨울 초입에 들어서려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11월 30일, 날씨가 마법처럼 추워졌다. 하늘도 겨울 하늘 특유의 맑고 높고 차갑고 날카로워 보이는 빛으로 변했다. 밤이 되자 구름도 별로 없는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첫눈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이 내리는 걸 처음 본 눈을 첫눈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길 위에 쌓여서 밟으면 소리가 날 정도가 되어야 첫눈이라 하고, 누군가는 또 다른 조건을 붙여서 첫눈이라고 이름 짓기도 하던데 내겐 11월 30일 밤의 눈이 첫눈이었다. 제법 추워서 차유리나 돌 위에 내린 눈이 바로 녹지 않고 잠시나마 형체를 유지해서 쌓인 것처럼 보였으므로, 찬 공기의 날카로움에 찢긴 듯 바스러져 내리는 눈이었으나 내리는 모습이 확실한 양감을 지닌 명백한 첫눈이었다.
눈은 날이 바뀌어 새벽까지 슬금슬금 내렸고, 언덕 꼭대기에 사는 우리는 첫눈 소식을 전하며 내일 언덕을 내려가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얘기하다 잠들었다. 추위가 비집고 들어올 수 없도록 어깨를 감싸거나 서로의 어깨를 하나의 담요로 덮은 채 첫눈을 보며 이야기하는 일은 없었다. 그럼, 다음에 세 식구가 같이 있을 때 내리는 눈을 첫눈이라고 해버릴까.
12월 1일 아침, 공주에 첫얼음이 얼었다. 첫얼음답게 조심스러운 살얼음이 아니라 단단하고도 제법 두툼한 제대로 된 얼음이었다. 그다음 날은 영하 10도라느니, 체감 온도가 영하 20도라느니 하는 뉴스도 들렸다.
사실 매년 겨울은 며칠 차이가 있겠지만 비슷하게 와서 비슷하게 춥다가 비슷하게 물러간다. 조금 더 두툼하게 입거나 조금 가볍게 입을 뿐 겨울은 어차피 추운 계절이라서 추운 게 이상하지 않고 오히려 춥지 않은 게 이상하다. 얄궂은 건 '나 이제 추워질 거야'하는 친절한 경고 없이 '나 겨울이지롱, 춥지롱'하듯 조금은 놀림당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는 거다. 겨울은 당연히 추운 거라고 생각하면서 추위가 조금 늦게 오기를 바라고 좀처럼 추위가 오지 않으니 왜 안 추워지는 건가 하다가 갑자기 추워지니 왜 갑자기 추워지고 그러냐며 놀라서 투덜거리는 게 나다.
공주 원도심에 살면서 이런저런 소문을 듣는데 그중 하나가 제민천 대통교 건너에 있는 목욕탕 자리에 생긴 카페 얘기다. 오래전 목욕탕이 있던 자리였으나 원도심에 사는 사람이 줄어들면서 목욕탕이 폐업했고 이후로 10년인지 20년인지 방치되었다는 얘기. 방치된 목욕탕을 사서 헐고 한옥을 짓자 '어째서 우리 소중한 추억이 담긴 목욕탕을 헐었느냐'며 원망하는 목소리도 있었다는 얘기. 그 와중에 멋지게 한옥을 짓고 깔끔하게 정리된 모습을 보고 '좋다'고 했다는 얘기. 공주 원도심은 분지고, 그 면적이 크지 않아서 오래된 집은 헐고 새집을 짓는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백제 왕도라는 자부심에 비해 오래된 집이나 건물이 없는 이유나 마을에 큰 나무가 없는 이유가 집을 자주 헐고 새로 지었기 때문이라고 하니 오래 방치된 건물이 헐리고 새 건물이 되는 게 사실 이상할 것도, 마음 상할 일도 아닌 거다. 그러나 마음 상해하는 사람이 있었단다. 그렇게 마음이 상할 거였으면 진즉에 사서 다시 목욕탕 영업을 시작하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런 얘기들이 2022년이 겨울을 맞이하는 방법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겨울이 시작되었으므로 어차피 언제든 추워질 건 정한 이치고, 추운 날을 보내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올 거라는 것도 확실한데 유난스러운 날씨라거나 강추위라거나 한파 주의라거나 하면서 투덜대기도 하는 나와 우리들. 오래 방치되었으나 다시 목욕탕으로 부활할 일은 없으므로 누가 되었든 헐고 새로 짓게 되었을 자리를 두고 '왜 그랬느냐'거나 '꼭 그렇게 해야 속이 시원했냐'거나 '잘했다'거나 하는 일도 날씨를 두고 투덜거리는 일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마치 깜짝 놀랐다고 말하기 위해 하루하루 깜짝깜짝 놀라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정도 놀람이, 호들갑스러움이 뭔가 고요하고 무거운 일상의 분위기를 잠시나마 가볍게 해 줄 거라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건 억지스러운 연기인가, 불필요한 소란인가, 적절한 힘씀인가.
거시적으로나 개괄적으로 보면 인생의 어느 날, 1년 365일 중 며칠 정도의 빠름이나 늦음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루, 한낮, 한밤, 한 시간, 한 순간을 사는 존재이므로 며칠의 변화, 그 빠르거나 느림을 두고 조금 호들갑스럽게 굴어도 괜찮은 것 아닐까.
행복의 반대말은 뭘까라는 물음을 오랜만에 다시 봤다. 그 물음에 답한 사람은 뭐라고 했더라.
다음에 다른 사람이 행복의 반대말을 물으면 다른 답을 할지도 모르지만 지금 떠올린 답은 '영원'이다. 거의 모든 행복은 순간에 있다. 시간을 영원으로 늘려놓고 보면 행복은 영영 멀어질지도 모른다. 오래, 영원히 행복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으므로, 영원하기를 바라며 그 영원 속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 추구하는 사람은 행복과 만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만큼은 올 겨울이 반드시 추울 거라는 얘기만큼 확신에 차서 해줄 수 있다.
2022년 12월 이야기로 시작해서 행복 얘기로 이 글을 끝날 줄 정말 전혀 몰랐다.
진실로 깜짝깜짝 놀라는 하루하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