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화이트 크리스마스.
올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잦고 많다. 이번 주 서해안을 중심으로 중부와 남부에 특히 많은 눈이 내렸는데 그 눈탓에 누구는 학교에 갈 수 없었고, 누구는 출근을 하지 못했다고 하는 얘기가 종종 들린다.
눈이 내릴 때 아이와 어른이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고 한다. 아이는 하늘을 보고, 어른은 땅을 쳐다본다고. 생각도 다르다. 아이는 신기함, 놀라움, 즐거움, 신남을 떠올린다면 어른은 눈을 치워야 하는 수고, 눈이 불러올 위험 혹은 해결해야 할 어려움들을 떠올린다고.
눈이 내릴 때면 아침마다 계단을 쓸고 마당을 지나 길까지 눈을 치우는 일을 의식처럼 치르는데 눈이 내릴 때나 눈이 그친 후에나 주로 땅을 바라보는 걸 보면 나도 어른은 어른인 모양이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마당 가득 쌓인 눈을 치울 때는 넉가래를 밀고 가면 생기는 길이 재밌었고, 쓸어낸 자리에 다시 쌓여 수고가 무색하진 비질도 즐거웠다. 같은 일을 하지만 다른 마음이 되는 것,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다른 마음을 품는 것, 그게 다 어른이 된 탓인 것만 같다.
우리는 동네에서 거의 가장 높은 데 산다. 공주 원도심에서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공산성을 마주 보는 정도의 높이. 오래전, 백제 웅진 시절에는 왕성 건물 일부가 세워져 있어서 왕국의 높은 분들이 오갔을 길에는 이제 남쪽을 의미하는 주작이 그려진 황색 깃발만 나부낀다. 그때는 높은 사람들이라서 높은 데 자리를 잡고 살았을 테지만 이제는 높은 데 산다고 더 높은 자리에 있음을 의미하는 날이 끝난 지 오래다. 공주 원도심만 해도 1970년대 이후에는 하천 범람이 드물어지면서 평지에 넓은 집을 짓고 안전하게 사는 분위기였음을 남아있는 집들이 증거한다. 옹기종기 모여있던 초가삼간들이 사라지고 이층 양옥집들이 들어섰으리라. 80년 대에는 더는 평지에 집을 지을 자리가 없어서 원도심 외곽의 언덕들을 깎아서 터를 닦고 집을 지었다. 언덕의 얕은 자리부터 점점 더 높아지다 80년대 중반에 마침내 우리 집 자리까지 집터가 된 거다. 처음에는 단층으로 지었다가 아직 하숙이 흔하던 시절에 이층을 증축해 지었다. 지은 사람이 다르고, 살 사람이 달랐기에 일층과 이층은 사에는 오가기 편한 연결 통로가 없다. 그게 우리 집이다.
이사한 첫해도 올해처럼 눈이 자주 내렸다. 아이가 어리고 시간 맞춰 출근하는 사람이 없었기에 새벽부터 일어나 눈을 치우는 일이 없었는데 번번이 앞집과 우리보다 더 높은 자리에 사는 두 집 남자들이 나와서 눈을 치워준 덕에 큰 어려움이나 위험 없이 겨울을 넘었다. 지난해에는 눈이 드물고 적었다. 두 번쯤 눈이 많이 내렸을 때 이제는 제법 걸을 수 있게 된 아이와 마당에 나갔지만 아이는 눈을 신기해하면서도 밟는 걸 겁냈다. 만지려 하지 않았고 함께 눈사람을 만든다거나 썰매를 타는 일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올해는 아이도 눈을 만지고 뭉치고 뿌릴 수 있게 됐다. 뽀도독하며 눈을 신나게 밟으며 뛰어다니고 가르쳐주지 않아서 그렇지 그 재미를 알게 되면 매일 썰매를 타겠다고 집 밖으로 향하는 문을 두드릴 기세.
높은 언덕 위에 살기에 이웃의 존재의미가 더 커진다. 서로가 자기 집 앞의 눈을 스스로 치우면 그만큼 그 길은 더 안전하고 편해진다. 길이 얼어붙어 미끄러우면 편하게 집안에 앉아서 주문한 물건이 집까지 올 수 없다. 누구도 그 책임을 묻지 않지만 스스로 짊어져야 하는 책임이 언덕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있다. 그게 높은 데 사는 사람의 숙명이고 책임이다. 위에 있다는 건 때에 따라, 계절에 따라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거다. 그럴 수 없다면, 그게 싫다면 평지로 내려와 살 일이다.
어제까지 눈이 내린 덕에 내일은 화이트 크리스마스.
눈이 내릴 때는 하늘을 보며 설레고 즐거워하기를 잊지 말고, 눈이 그친 후에는 땅 위를 보며 우리와 이웃이 다닐 길을 안전하게 할 책임을 다 해야지. 아이와 함께 얕은 언덕에 올라 눈으로 할 수 있는 놀이와 눈이 주는 즐거움을 함께 해야지.
50센티니 60센티니 하는 눈이 내렸다는 지역처럼 손 쓸 수 없이 쏟아지지 않은 눈에 안도하고 많은 눈이 내린 마을과 마을들에 이웃과 그들을 생각하는 마음들이 함께 하기를. 춥지만 포근하게 느껴지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밤과 낮이 평안하고 무사히 지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