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없는 그루터기는 없다.
오늘 아침이다.
보슬보슬 내리는 비에 우산을 받치고 늘 걷는 길을 지나 제민천으로 향하던 중이다. 문득 우산 아래 풍경이 낯설다 싶어 올려보니 개운한 듯 허전한 하늘이 있다. 뭔가가 없어진 듯한데 뭐였을까 하며 시선을 내리는데 마찬가지로 낯선 그루터기 하나가 보인다.
"잘랐구나."
유난히 키가 커서 건물에 빛이 다 가려지고도 이른 꽃을 피우던 자목련이 서 있던 자리다. 나무는 없고 그루터기만 남아 개운해진 시야 가득 흐린 하늘을 담고 있다. 문득 엊그제 저녁 빌라 옆 나무 곁에 새로 쌓아둔 통나무들이 떠올라 몇 걸음 되돌아가 보니 며칠 전까지 서있던 나무가 짤막하게 잘려 누워있다.
"너였구나."
단풍나무 가지를 쳐두었기에 그 가지인가 보다 무심히 지나쳤건만 가까이 보니 목련이다. 왜 잘랐을지 얼른 이해가 된다. 꽃을 보기는 좋지만 꽃 지고 나서는 비록 북쪽에 서 있는 나무지만 왠지 이 나무 때문에 더 그늘져서 어두웠을 집이 싫었을 거다. 나무는 살아있는 동안 뿌리를 점점 깊이, 넓게 내릴 거고 더 많은 빛을 바라며 가지를 뻗어갈 테니 그 가지가 집에 닿으려 할 때마다 쳐내기 번거로웠을 거다. 뉴스에서는 어느 집 가스배관, 배수관을 타고 도둑이 들어왔다고도 하니 나무를 잘 타는 도둑이 집에 들어올까 새삼 걱정이 됐을 거다. 고작 수십 년 된 자목련 한 그루를 자르기에는 차고도 넘칠 만큼 충분한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을 거다.
잘라 쌓아 둔 나무 옆에 코팅된 종이 한 장이 있다. 거기엔 "여기에 아무것도 버리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다. 높은 확률로 나무를 자르는 데 동의하고 자른 나무를 여기에 두는 것 역시 허락했을 그 사람들이 남긴 메시지일 것이므로 조금 더 생각을 이어 나가보면 이 나무토막들은 버려진 게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버린 사람은 버리지 않았으나 버려진 나무는 버려진 풍경 이야기다.
좁은 골목.
그보다 한참 좁은 건물과 난간 사이에서 뻗어 올라간 나무는 어떻게 그루터기만 남게 됐을까.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그 존재조차 모를 나무의 마지막을 단지 흔적을 발견했을 뿐인 '행인 1'이 여기에 적는다.
유난히 일찍 핀 꽃이 지고 나무는 올해도 어김없이 잎을 펴고 키운다. 이름 없이 자목련이라 불리는 나무는 처음 심겼을 때는 자기 키보다 까마득히 높던 건물의 끝에 거의 다다랐다. 건물에 가까웠던 탓에 사람들은 자꾸만 가지가 옆으로 뻗지 못하게 잘라냈으므로 위로 자랄 수밖에 없던 덕이다. 자목련은 올해, 어쩌면 내년에는 처음으로 하루 중 가장 따뜻한 남쪽 햇빛을 직접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며 품어 본 적 없던 기대가 마음 한 구석에서 커져가는 걸 느꼈다. 자목련이 자라는 골목은 평소 사람이 좀처럼 다니지 않는다. 멀지 않은 거리에 사람이 제법 오가는 길이 있지만 사람들은 제민천에 눈길을 줄 뿐 골목을 들여다보는 일이 적었다. 골목에 시선을 주더라도 꽃이 피는 봄 한 때가 아니면 초록 잎을 달고 있는 키 큰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침도 점심도 아닌 때다. 몇 사람이 웅성거리며 자목련 곁으로 온다. 저마다 다른 걸 손에 들었는데 긴 사다리와 톱이 낯익다. 올해는 조금 일찍 가지를 치려는가 싶은데 그 뒤에 오는 사람은 처음 보는 걸 들었다. 톱 같은데 더 크고, 둥글고, 소리가 난다.
한 사람이 사다리를 건물 벽에 걸친다. 다른 사람이 톱을 들고 오른다. 사다리를 걸친 사람은 사다리를 붙들고 선다. 평소와 다른 건 곁가지가 아니라 꼭대기 줄기를 먼저 자르고 곁가지를 줄기에 닿을 만큼 가까이 자르는 것뿐이다. 한 번 톱질이 끝날 때마다 꼭대기가 하늘에서 멀어진다. 올해나 내년은 어렵겠고, 몇 년쯤 더 자라야 빛을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제 톱으로는 자르기 힘든 줄기까지 가지를 쳤다. 처음으로 요란한 소리가 밖이 아니라 나무줄기에서 난다. 소는 자기가 죽는 줄 알고 눈물 흘린다던데, 이 순간을 마주하니 자목련도 깨닫는다.
"아, 가지치기가 아니라 그거구나."
사람들은 기계적으로 얼마쯤 되는 길이대로 나무를 자른다. 2층만큼, 1층만큼, 그러다 어른 키만큼, 아이 키만큼, 마침내 그루터기만 남을 때까지 말끔하게 잘라낸다. 잘라낸 가지와 줄기는 자른 순서와 반대로 쌓인다. 꼭대기 줄기, 잔가지, 줄기, 조금 더 굵은 줄기, 더 굵은 줄기, 밑동의 가장 굵은 줄기를 끝으로 골목길이 개운해진다.
나무는 아직 죽지 않았지만 꽃 피울 가지도, 하늘에 닿을 줄기도 사라진 나무에게는. 이 순간만큼은 살아있음이 다만 죽지 않았음일 뿐 그 어떤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그렇게 매년 봄 꽃 피우던 키 큰 자목련이 있던 자리에는 꽃피우지 못하는 그루터기만 남았다.
희망을 이야기하자면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다시 작은 가지가 나고 자라서 다시 꽃을 피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꽃은 처음 그 자리에 심긴 후로 언젠가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자 했던 그 나무의 꽃이 아니다.
어느 소도시, 어느 봄 이야기다. 이유 없는, 사연 없는 그루터기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