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지 않은 배려심
어린이집 등원길에 아이가 한 말을 되새겨보는데 괜히 생각이 많아진다.
지난 월요일부터 기침을 하기에 병원에 가니 후두염이라며 약을 줬다. 약을 다 먹고 한 번 더 갔더니 물약만 바꿔서 또 주기에 그마저 먹이고 어제 다시 다녀온 길이다. 병원에서는 선생님을 향해 웃으며 혼자 걸어간다. 그럴 때면 아픈 게 맞나 싶다가도 기침을 하고 잠을 설치는 걸 보면 걱정이 되는 것이다. 매번 먹는 약이 지겨울 텐데 언제부턴가 아이는 거부하지 않고 스스로 먹는다. 아픈 게 나아야 아이스크림을 먹는다는 달콤한 이유도 있겠지만 약을 먹어야 얼른 낫는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된 거라는 짐작도 있다.
차에 탄 아이가 말했다. 바로 전에 어린이집에 가거든 마스크를 하고 있으라는 얘기를 엄마에게 들은 후다.
"마스크 안 하면 친구가 아파."
그러면서 어린이집에 도착해서 마스크를 쓰자는 제안을 거절하고 지금부터 쓰겠다는 거다. 결국 엄마가 마스크를 씌워주고 난 후에야 출발했다. 어린이집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낫다는 얘기의 시작은 낮에 덥다고 하는데 그러면 에어컨을 켤 것이고 그 에어컨 바람이 기침하는 아이에게 해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스크 얘기에 아이가 친구들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먼저 꺼내놓은 거다. 아마도 전에 우리가 했던 말, 선생님의 말이 떠올라서 한 말일 텐데 친구들을 아프게 할까 봐 마스크를 쓰고 있겠다고 하는 마음이 너무 예쁘다.
잠시 잊고 있다가 문득 '이제 그런 말도 할 줄 알고 대견하네'하고 생각하고 보니 등원길의 아이의 그 말이 배려구나 싶어지는 거다. 자신의 기침이 친구들 중 누군가를 아프게 할 수 있으므로 불편하고 답답하지만 참아내는 일. 마스크 세상은 코로나 시대가 그려낸 비극의 상징이 됐지만 아이는 마스크를 쓰면서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을 배려를 실천하고 있었다. 마스크 의무화 이후에 이슈가 된 뉴스가 제법 많았던 걸 떠올려보면 아이들이 해내는 자연스러운 배려는 몹시 놀라운 것이다.
단체생활을 하는 아이들은 언제, 누구에게서 왔는지 모를 다양한 질병에 노출된다. 개인의 면역, 체질에 따라 다르지만 서로 조심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결국 자신들에게 어려움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올 어려움에 대한 건 어른들이나 하는 생각이다. 아이는 그보다 단순하게 더 순수하게 배려에 가까운 마음이었을 것이다. '내가 마스크를 쓰면 친구가 아프지 않아도 된다'는 그다음을 생각하지 않는 마음. 그런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더니 괜히 부끄럽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해지는 거다. 아빠 마음에는 누가 기침을 하더니 다른 누구도 그렇게 됐다거나 하는 돌아올 수 있는 비난과 미안함의 화살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아이의 마음과 조금 다른 것이다.
세상에 당연한 배려는 없다. 배려하려면 뭔가를 내어주거나 참아내거나 살피려는 노력이나 수고를 들여야 한다. 배려는 손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느끼는 요즘 같은 때는 더 어려워진 것이 배려다. 각자도생이라는 말이 수시로 들리는데 각자도생의 세계에는 배려가 살아남을 수 없다.
한때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두 발로 걸어 다니게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정글북을 보고 사람도 네 발로 뛰어다니고 늑대처럼 울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사람이 혼자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건 모두가 알 텐데 서로 돕기보다 힘으로 누르는 게 쉽다고 믿는 듯 보이는 사람들을 본다. 배우지 못한 배려, 다르게 배웠을 공존의 방법이 세상을 이렇게 바꿔버린다. 뱀과 개구리는 공존하지만 뱀이 포식자로 개구리를 먹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인간이 뱀과 같을 수 없는데 어떤 삶을 보고 배우면 그렇게 자라는 걸까.
아이를 생각하면 늘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이 지점이다.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나는 아이에게 어떻게 비치는가. 이상적일 수는 없더라도 균형을 잃지 않고 있는가를 자꾸 되묻게 된다.
성찰.
아이를 보며 배운다. 마치 아이가 경전이라도 되는 것처럼 탐독한다. 헤아려보고 되묻고 다시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