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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Dec 28. 2023

만인의 공감보다 한 사람의 이해

2024년의 다짐, 소망 그리고 

나는 말이 많다.

약한 사람은 말이 많다.

그러므로 나는 약하다.


 삼단논법을 흉내 낸 위 문장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면 논리적으로 검증하기 어렵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 관한 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참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이 참아줘도 나는 말이 많고, 스스로 약한 자리에 있으므로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고 느끼고 이 느낌은 확신에 몹시 가깝다. 무엇보다 나는 강하다고 말하기엔 한 없이 약하다. 허세로도 '네가 좀 쎄'라고 말하기 부끄러울 만큼.


 많은 말로도 부족해 말하지 못한 생각들을 글로 남겼다. 말보다 느려서 답답하다가도 쓰면서 조금씩 분명해지는 듯 보이는 생각을 마주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글로 남긴다는 건 독자, 읽어줄 사람의 존재를 기대하는 활동이기에 감춰둔 욕심이 매일 자라기 시작했다. 더 많은 사람들, 세상에 보여줄 만한 글과 생각을 내놓으라고 좁은 방 안에 갇혀 지내는 마음에게 요구하기 시작한 거다. 기록과 정리를 위한 쓰기는 세상에 드러내기 위한 쓰기와는 많이 달랐다. 당장의 비판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비난까지 염두에 둬야 했다. 나는 자꾸만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모난 글자를 지우고 둥글거나 둥글어 보이는 글자로 바꿔 썼다. 그렇게 완성된 글은 가끔 보기 좋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은 날이 많았다. 솜씨 없는 손으로 만든 찰흙 인형처럼 내 손에서 나왔지만 나를 닮지 않은 모습이 도무지 친근해지지 않았다. 조금 덜 외로울까 하는 마음에 곁에 친구를 뒀더니 오히려 더 외로워진 경우와 같았다. 그래도 계속 썼다. 지치면 지쳤다고 적었다.


그건 세상을 향한 구애였으며, 마음속 슬픈 소리였다.


그것은 저에게 있어 인간을 향한 최후의 구애였습니다_다자이 오사무 『인간실격』
무사태평해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_나쓰메 소세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굴곡져 생긴 그늘이 오히려 구름을 다채롭게 하듯이

 비극이 두려워서였는지 비극을 즐겨 읽는 동안 동경이 생겼는지 내가 쓰는 글이 비극의 분위기, 냄새를 풍기기를 꿈꾸게 됐다. 나쁜 상상, 해로운 가정을 하면서 '만약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를 걱정하는 글을 썼다. 식상한 비극의 시나리오, 흔한 염세주의자의 흉내는 그만두라는 냉대에 '조심하지 않으면 막을 수 없다'며 걱정으로 소란한 마음을 정당화했다. 상상은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길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망상이 되어버리기 쉽고 망상은 삶을 흐릿하게 만들어 기쁨마저 슬픔과 뒤섞어 버린다. 비극을 즐겨 읽는 사람은 있을지 몰라도 자기 삶이 비극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으므로 비극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경고는 멀리 해야 하는 소음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내가 경고하려던 비극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세상은 그런 걱정이나 염려, 경고보다 작고 조용한 배려와 응원, 실현 가능한 희망으로 움직였던 것이다.


 평화를 지키는 건 어렵지만 전쟁을 즐겨하는 지도자는 국민에게 전쟁의 좋은 점을 매일 이야기한다. 지도자란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바라보게 만드는 사람이므로 그가 가리키는 곳이 까마득히 멀어도 가까워 보이게끔 만드는 거다. 전쟁이 불러올 참상은 숨기고 희생은 '우리'의 몫이 아닐 것이라 말하지만 그 '우리'에 속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히지는 않는다. 믿게끔, 착각하게끔, 뒤늦게 깨닫게끔 한다. 비극을 예언하는 내가 늘어놓은 글들이 그 전쟁을 즐겨하는 지도자였다. 지면 위에서 나는 전사였고 타협하지 말아야 했으며 물러선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물러설 곳이 없으므로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하는 배수의 진 앞의 병사인 줄 알았다. 


심장이 하나라서 마음도 하나여야 하는 줄 알았다. 어제 한 말과 오늘 마음이 다르면 어느 것이 진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를 묻느라 하루를 쏟았다. 잘 다듬어져 하나로 완성된 인격, 한결같음, 흔들림 없이 단단한 신념. 그것이 나이며 내 것이기를 소망했다. 2023년 끝자락에서 하는 다짐은 자꾸 뒤섞이는 마음을 하나로 하지 말고 나뉘도록 내버려 두자는 거다. 요즘 유행하는 부캐라고 생각하자는 거다. 확신하는 나와 의심하는 나. 믿는 나와 불신하는 나. 서로 '너는 내가 아니다'거나 '원래 나는 그렇지 않다'는 말을 못 하게 떨어뜨려 두는 것이다.  


 글이란 결국 이해를 위한 단서에 불과하다. 조금 늦었지만 억지로 끼워 넣은 조각들을 모두 쏟아 놓고 처음으로 돌아간다. 나는 내가 어려웠다. 사람들이 안다고 말하는 내가 진짜 나인지 늘 의심스러웠다. 내가 나라고 믿는 혹은 알고 있는 내가 정말 나인지 알 수 없었다. 이해하고 싶어서 들여다보면 유일한 나는 없고 사람들과 뒤섞여 세상에 휘둘리는 나만 보였다. '이건 내가 아니야'라고 부정하려고 해도 온통 그런 나로 가득해서 숨이 찼다. 


 이제야 조금 알게 된 기분이다. 이해는 아는 것에서 오는 게 아닌지도 모른다. 받아들이려는 마음, 그럴 수 있다는 틈, 여지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는지도. 나는 왜 그렇게 스스로에게 단호하려고 하고 엄격하게 굴었을까.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을까. 두려워하면서 그 두려움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적으며 숨기려고 했을까. 거창하게 다짐이랄 것도 없이 두려움을 두려움이라고 쓰는 일. 그런 나와 마주하는 일. 만인의 공감은 물론 기쁘지만 한 사람을 조금 더 이해하는 시간으로 삼으려고 한다. 그래야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은 소망이 '그리고' 다음으로 이어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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