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하다 멀어진 경우에 관하여
알아주는 사람은 없지만 자주 반성하는 편이다.
오히려 반성을 너무 심하게 해서 일반적인 인지나 감수성과 멀어지는 경우도 많은 듯하다.
그러나 반성을 포기할 수는 없다. 반성이란 내가 생각하고 주장해 온(홀로) 인간의 본질이라서다.
반성을 포기함으로써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이나 생겨나는 관계는 끝까지 가보지 않아도 파국임을 충분히 경험해 왔다. 파국으로 치닫는 관계보다는 관계가 없는 게 낫다. 이 생각이 흔들린 적은 있지만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그것이 나의 근거이자 증거다.
한 줄짜리 메모 끝에 '마주친다'라고 적었다가 '만난다'로 고쳤다.
마주친다는 건 어쩐지 우연이나 운명에 거는 기대가 큰 것 같은데 메모 내용은 기다림보다 찾아감, 멈춤보다 움직인 결과에 대한 것이라서 더 적당해 보여서다. 처음부터 더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던 스스로를 반성하며 한 번 더 기억할 수 있도록 굳이 글로 박제해 두는 게 내 반성의 한 예다.
반사회라는 단어를 떠올린 건 일방통행 도로에 매일 역주행 방향으로 세우는 차를 발견한 순간이다. 볼 때마다 위치가 달라진 걸 보면 움직이지 않은 건 아니고, 어쩌다 보니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알고 있어서 일방통행이란 걸 모른다거나 하는 여지가 없다는 걸 잘 아는 상태라 떠올릴 수 있는 말이 한정되었다.
반사회는 사회에 반하는, 규칙을 따르지 않는, 사회의 약속이나 관습에 반대한다는 의미다. 반사회적 행동이란 쉽게 말하면 세상은 모르겠고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선언인 셈이다. 극단적으로는 뭔가를 부수거나 동조하는 사람들을 모아 사회를 어지럽히기도 한다. 왜 그러는지, 왜 그래야 하는지 물어도 그들은 다만 화를 낼 뿐 돌아보거나 대답하거나 반성하지 않는다.
고작 일방통행 도로에 매번 역주행 방향으로 차를 세우는 걸 보고 반사회적이란 단어를 떠올린 게 이상해서 다른 표현이 있을까 생각해 봤다. 그렇게 떠오른 단어가 비사교다.
사교적인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의 규범을 지키는 방향으로 행동한다. 규범을 부수는 방향보다는 따르는 걸 택하고 규범이 잘못되어서 폐해가 크다고 생각되면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과 만나 뜻을 모으고 규범의 잘잘못을 논의하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의견을 말하고 의견이 다른 사람과 조율하는 능력은 사회성이면서 사교의 중요한 방법인 거다. 비사교적인 사람은 그런 방법을 습득하지 못했거나 습득하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들이다.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 중인 사람도 있고, 사람과의 접점을 최소화하는 삶을 선택한 사람일 수도 있다. 이건 하나의 성향이라 선하거나 악하다로 나눌 수 없는 것이다.
역주행 방향으로 차를 세우는 사람은 어느 쪽일까, 어느 쪽에 더 가까울까.
그를 알지 못하므로 둘 사이에서 조금 더 방황하게 두도록 내버려 둔다.
반성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나'는 어느 쪽인가.
반드시 둘 중 하나, 양자택일 문제가 아니지만 굳이 택하다면 어느 쪽에 가까운가.
스스로는 반사회와 거리가 먼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상식과 보편에 기반한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파괴하거나 거부할 생각이 내겐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편에 서 있는 사람들, 나와 다른 상식과 보편에 기반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다면 내 생각이나 의견은 부정 혹은 반박당할 거다.
마주친다와 만난다, 반사회와 비사교, 반성하는 인간이 무슨 상관이 있어 한 편의 글에 한꺼번에 등장했을까.
반성하는 인간은 거의 반드시 타인과 갈등을 일으킨다. 갈등과 만나는 길을 스스로 택하는 셈이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일어나는 마주침과 달리 반성하는 인간은 반드시,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쩌다 우연히 마주치는 드문 곤란일 갈등이 반성하는 삶에서는 일상이 되는 거다.
이런 이유로 반성하는 인간들이 날카롭고 예민해 보이며 다투기 좋아하는 듯 보이는 것 역시 당연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갈팡질팡 하며 좌충우돌하는 것 말고 떠오르는 방법이 없다.
다만 애쓸 뿐.
다만 쓸 뿐이다.
어린이날 궂은 날씨를 반성하는지 어버이날의 맑은 하늘과 공기와 벌써 짙어진 녹음.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면 반드시 맑은 하늘을 만난다. 땅만 보고 걸으며, 맑은 하늘과 마주치기를 기다리지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