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알아차리기
내가 나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땅속으로는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나가는 나무라고. 어지러울 만큼 자유롭게 가지를 뻗으며 한껏 자라기를 바라지만 어느 날엔가 우연히 산이나 들에 뿌리내리게 된 야생의 나무가 아닌 누군가 정원에 심은 나무라를 걸 깨닫고 실망한 작은 나무.
못난 말이지만 덕분에 꺾일 때마다 사람과 세상을 탓했다.
"이건 내 한계가 아니야. 다 환경 때문이야."하고 투정 부리며 돌아설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목적을 갖고 목표를 정할 때마다 낙오했다. 누구는 그건 목적을 갖거나 목표를 정한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버거운 목표를 세운 네 잘못이라고 했다. 불가능한 꿈을 꾸며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투정 부리는 건 그만두라고 했다.
조금 정신이 들었다고 얘기하고 다닐 무렵에는 스스로를 닭발가로수라고 믿었다. 어떤 가지는 세상의 기대로, 어떤 가지는 스스로 자꾸만 잘라버려서 몸통만 흉하게 남은 잔뜩 자라난 나무 같았다. 슬프고 애처로우며 고통스러운 모습. 나를 들여다보는 모든 순간이 아픔이 됐다.
그러므로 나의 슬픔은 정당했다.
아프다는 외침은 당연했다.
그만하라거나 그만두겠다는 요구와 선언도 그랬다. 그런데 오늘 다시 본 화분이 그 모든 감정과 기억에게 되묻는다.
"정말이야? 진짜 그렇게 생각해?"
말을 걸어온 건 지난봄 책방 앞에 가져다 둔 화분이었다.
처음 가져다 놓은 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화초는 부쩍 자랐다. 얼마 전부터 화초는 잎을 늘리기를 잠시 멈추고 꽃대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침마다 자라던 꽃대 끝에 봉오리가 맺힐 무렵 누군가의 실수였는지 꺾여있었다.
꺾인 꽃대는 보기 싫었다. 잠깐 잘라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책방에 가위가 없다는 게 떠올라 화분을 돌려서 꽃대를 고양이 집 위에 올려두고 자리를 떠난 게 그저께였다.
오늘은 잘라낼 생각이었다.
이틀이나 맑은 날이 이어졌기에 꺾인 줄기는 이미 시들었을 게 당연했다. 그래서 놀랐다. 꽃대는 시들기는커녕 최선을 다해 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같이 올라온 다른 꽃대보다 핀 꽃은 적었지만 분명 살아있었다.
두 계절을 들여 피우려던 꽃이 꺾였음에도 포기하고 시들어버리기보다 끝내 꽃을 피워낸 거였다.
갑자기 마주친 장면을 놀란 마음으로 보다 예상 밖의 기쁨을 느끼고 돌아오는데 문득 그동안의 슬픔과 아픔, 정당한 요구와 선언을 두고 정말인지, 그렇게 생각하는지 묻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나는 나무가 아니었다.
오히려 화분에 심긴 화초와 같았다. 혹독한 계절도 목마름도 모든 걸 혼자 이겨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겨울에는 실내로 옮겨줄 손길이 필요했고, 화분이 작아지면 옮겨주는 친절도 간절했다. 기울여 흘러들어오는 물처럼 애정과 사랑이 즐겁고 더 많이 받기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지만 지나치면 오히려 독이 되는 걸 기억해야 했다.
화분이 작아졌다.
꽃이 지면 뿌리를 나누고 조금 더 큰 자리로 옮겨 수월히 자랄 수 있도록 도와줘야겠다.
나는 풀.
가지가 꺾이면 말라버리는 나무보다 조금 더 질긴 마음을 품은 사람.
늘 먼저 꺾이는 건 내 마음이었다는 걸, 소중한 것 역시 마음이었다는 걸 뒤늦게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