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끝, Cape Horn을 지나 세상의 중심으로 떠나는 여행
단 한 번 주어진 내 생애를 배와 함께하는 마도로스(matroos 네델란드어)라는 직업인이 되어서, 어느덧 저물어 가던 20세기 말에 도착할 즈음, 시끄러운 Y2K(주1*) 소동에 파묻혀 정신없이 꼬물거리는 제자리 상태의 해상생활을 영위하던 무렵의 어느 날이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먼 일로 여기고 있던- 정년퇴직이란 명제가, 갑자기 퇴직 도래 연한을 4년이나 줄여가며 새롭게 조정한 기한으로 만들어서, 허울 좋은 명퇴란 그물까지 씌워가며 선원사회를 흔들어 왔다. (회사는 정년퇴직 연한을 만62세에서 만58세로 줄였고, 특별히 1~2년 안에 새로운 퇴직연한에 걸려든 사람들에게 한시적으로 만60세까지 2년간의 임시직으로 근무하게 해주는 것으로 명퇴를 주었던 것이다.)
2002년도 말. 내 간절했던 바람과는 관계없이 쫓겨나듯 퇴직 당하던 황당했던 순간들이 지나간 후, 옥죄이듯 찾아드는 초조감을 벗어나려 발버둥 치면서, 문득 떠 올린 "케이프 혼(Cape Horn)을 지나면 무엇이 있을까?" 라는 제목으로 내 지난 삶의 궤적을 인터넷 블로그에 올려주면서 마음을 추슬러주는 작은 다독임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서 주어인 혼 곶(Cape Horn)은 남미대륙 최남단에 위치하여,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Cape of Good Hope), 오스트레일리아의 루윈곶(Cape Leeuwin)과 더불어 지구상 세 개의 그레이트 케이프(Great Cape)로 지칭되는 곳 중의 한 곳으로, 이 셋 중에서 가장 남쪽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이 세 곳의 Cape(*주2)는 내 승선 생활 중 모두 지나쳐 본 통항의 경험을 가진 곳으로 특히 희망봉은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교통의 요지이지만, 기실 아프리카 최남단 육지 끝이 아니라 최남단 자리는 좀 더 동남쪽에 위치한 Cape Agulhas에게 양보해주어야 한다. 또한 호주의 루윈 곶(Cape Leeuwin)은 세계 3대 무엇이란? 물음에 구색을 갖추기 위해 넣어준 곳이란 기분을 갖게 하기에 크게 떠올릴만한 이야기꺼리는 적은 곳이다.
그러나 남미 대륙 최남단 칠레의 티에라델푸에고 제도에 속해있는 혼 곶(Cape)은 영어로는 Cape Horn 이니 <뿔곶(串)>이라고 번역해도 되겠지만, 뱃사람답게 Horn의 또 다른 뜻인 기적(汽笛)을 떠올리며 혼 이라 읽다보니, 어찌타 음역은 魂(혼)으로 이해를 넓혀가기를 청하는 것 같다.
그 그럴 듯한 의미를 모아서 <汽笛,魂의 岬(串)>으로 만들고 보니 뱃사람만이 느끼는 뿌옇게 피어나는 안개 속을 열심히 달려야 하는 무중항해(霧中航海)를 연상시키는 묘한 감회마저 스멀거리면서, "케이프 혼(Cape Horn)을 지나면 무엇이 있을까?"로 표현된 한 마도로스의 반평생 이야기 제목에 스스럼없다고 여겨본 것이다.
어쩌면 그 지(해)역이 가지고 있는 지구상 남쪽 끝에 치우친 위치와 함께 기상학적으로도 독특한 자연환경과 어울리면서 바다는 강풍과 큰 파도, 빠른 해류와 유빙마저 떠도는 극히 위험한 경우를 빚어내기도 하면서, 선원의 무덤이라는 악명마저 가졌었고, 이 모든 상황이 내포하고 있는 그야말로 사람들의 혼(魂)이라도 삼킬 듯한 으스스함의 묘한 매력이 역설적으로 나를 매료시키며 압도하고 나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내 생각과는 무관하게 케이프혼(Cape Horn)이라는 이름의 실상은 네덜란드 항해가였던 빌렘 쇼우텐(Willem Schouten)이 처음 이곳을 통항한 후, 자신의 고향인 네덜란드 도시 호른(Hoorn)에서 이름을 따서, 카프 호른(Kaap Hoorn)이라한데서, 스페인어로는 카보 데 호르노스(Cabo de Hornos)라 불리며 오늘에 이르렀다는 게 득명의 정설인 모양이다.
사실 선장으로서 한창 잘 나가고 있던 지난 세월의 어느 날, 회사는 급한 전문으로 호주 동부에서 태평양을 건너지만 파나마 운하는 거치지 않고, 남미대륙 끝단(케이프 혼)을 돌아서 대서양으로 들어가는 예정을 가진 사선에 전선(轉船,*주3)하여 주도록 요청해 왔다.
파나마 운하를 통하지 않고 그 항로로 항해해야 할 피치 못 할 예정을 가지게 된 그 배에 급하게 전선하도록 명받은 사유가 당시 승선 근무 중이던 선장이 그런 항로로는 항해할 수 없다는 강력한 승선 거부 의사를 표했기 때문이었음은 전선을 결심한 연후에 전해들은 이야기로 알게 된 사실이었다.
그 만큼 그 항로는 예로부터 항해자들에겐 악명 높은 난코스의 거친 해역이라는 선입견의 무서움을 주는 곳이기도 했다.
나 역시 당시 회사의 전선 명령을 받았을 때, 그 항로를 기피하고 싶은 마음의 쓰라림이나 옅은 공포의 그림자가 비쳐들었었음을 고백 안 할 수야 없지만, 그래도 선장이라면 가 볼 수 없는 해역이 따로이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결심을 굳히며 회사의 명령에 순순히 순응하였고, 결국 아무런 일도 발생치 않고 무사히 그 항로를 통한 항해를 완성했었다.
그 후에도 한 차례 더 그 항로를 이용하여 항해를 하는 경험을 보태면서 세월을 보내었지만, 아직까지도 그 무엇이 케이프 혼을 지나면 있는지? 는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 세월을 축내고 있다는 한 번씩 불뚝이며 쑤석거리는 자책어린 독백에, 이미 해상생활을 벗어난 요즘이지만, 마음 한 구석이 서늘해지고 풀죽어 하는 지경에 빠져 들기도 한다.
여러 가지 기상의 건습 기록을 갱신해대는 끈질겼던 가뭄과 무덥고 습한 열대야로 우리들의 진을 빼내며 태풍마저 불러들이든 계절이 되더니 어느새 2015년은 가을이 찾아오는 유수같은 세월 되어 안타까움만 보태고 있다.
세상사 삶에 대한 애착이나 서러움에서는 벗어난 형편으로 정년퇴직 후의 맡겨진 삶을 스스로 다독이면서 현재로 잘 살고 있다고 자부하고는 싶지만, 그래도 삶의 이룸에 못 다한 작은 아쉬움 역시 스며 나오며- 마음 여리게 하는 것- 이 또한 있음직한 일이겠거니 타협을 해본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오늘은 어떻게 하루를 아쉬움 없이 보낼 수 있을까?를 떠올리며 시작해 보건만, 어느새 나태와 함께 엄벙덤벙 시간을 보내고 난 후 또 하루를 아무런 보람 없이 보냈다는 후회에 젖어들며 안타까운 한숨을 가만히 내 뱉게 되는 사실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날,
-당신은 아직도 예전의 배 타던 시절이 그립고 더 못 타서 아쉬운 모양이에요? 그렇죠?
점심 식사 중, 이야기 끝에 아내가 나에게 핀잔이라도 주듯 해온 말이다.
-뭐요?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 당신이 둘째와 배 타는 이야기를 할 때 보이는 모습이 그래보여요.
2항사로 배를 타다 연가로 쉬고 있는 둘째와 내가 배안에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는 걸 옆에서 보며 그런 느낌을 받았다는 것이다.
어쩌면 승선중의 이야기 중 그 애에게 알려 줄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싶어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며 부연하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알게 모르게 그런 나의 태도가 승선에 대한 향수랄까 희망사항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는 느낌으로 받은 모양이다.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그렇게 보인 이미지이니 그냥 웃으며 받아들이기로 한다. 허나 이미 현장을 떠난 입장인데, 얼마나 내 생각이나 내 의견이 그곳에서 필요하고 유용한 일이 될 수 있을까?를 짚어보면서는 고개를 갸웃하니, 입술은 삐쭉일 수밖에 없어 주춤하니 뒤로 물러서는 심정됨도 또한 현실이다.
어쨌거나 배를 탔다는 마도로스로서 내 생애 대부분의 좋은 시절을 보내고 이제는 그 사실을 기억하고 또 그리워하면서도 점점 자투리 되어 망각의 늪으로 속절없이 빠져드는 세월에 발마저 동동 구르게 되는 현실의 초조감에 서러워지기도 하는 요즘이다.
*주1 : Y2K(Year 2000) - 컴퓨터 2000년 문제, 또는 밀레니엄 버그로 통칭되는 컴퓨터대란을 의미하며, 이는 정보시스템 또는 자동화설비 기타 자동제어장치 (이하 "정보시스템등"이라 표시함)에 연도를 표기함에 있어 전체 4자리 중 마지막 2자리만을 사용하거나, 정보시스템등이 2000년을 윤년으로 인식하지 못함에 따라 날짜 또는 시각이 정확히 처리·계산·비교 또는 배열되지 못하여 정보시스템 등의 정상적인 작동에 장애가 발생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장애 작동을 막기 위해 1900년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2000년대가 도래하기 전에 우리 인류가 해결해야만 할 커다란 문제로 인식하여 세계가 떠들썩하니 빠져들었던 일이다.
*주2: Cape는 의상의 망또를 이르기도 하지만, 지리적 명사로 곶, 갑(岬)(headland)을 뜻한다.
*주3 전선(轉船): 사명으로 현재 승선 중인 선박에서 다른 사선으로 옮겨 타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