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해양대학에 입학하던 때를 떠올리며 지금을 돌이켜보다
계절의 싸늘함이 지나치는 바람결 되어 선뜻함을 한 번씩 얼굴에 뿌려주며 달려가던 초봄의 1961년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경부선 열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이던 때에 부산 피난학교 생활을 마무리 짓고 환도열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던 7년 만에 다시 찾아가게 된 부산이었다.
차창 밖을 스쳐 가는 멀리 주변 민둥산의 그림에 아쉬운 눈길을 품으며 부산을 향하고 있었지만, 최종의 목적지는 앞으로 4년간 대학생활을 해야 할 영도 동삼동 618번지의 한국 해양대학이었다.
당시 한국 해양대학은 특차로서 입학전형시험을 치르게 하던 국립대학으로 입학 후 특전으로 4년간 국비로 의식주가 해결되는 기숙사 생활과 관복 지급, 그리고 내야 하는 학자금도 당시 공립 중고등학교 수준 정도로 이 모든 대학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는 점으로 전후 가난했던 가정의 신입생들에게는 더할 나위가 없는 특혜를 가진 대학이기도 했다. 그렇게 찾아온 학교 이건만 다음 날부터 <가입교생>이라는 신분으로 탈바꿈되어, 해양인-선원-으로 적격한 심성과 몸상태를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내기라도 하려는 듯한, 상상하지도 못했던 한 달간의 고된 훈련생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실 우리들은 일반 타대학들의 정식 입학식보다 한 달이나 빠른 날짜에 학교를 찾아왔던 것이고, 속칭 내무 훈련이라 칭하던 그 훈련은 대한민국 남자이면 누구나 해야 했던 논산훈련소 입소 훈련보다도 더 엄격하게 진행된, 상선 사관을 위한 준군사훈련의 스케줄에 따라 규칙적인 기상과 취침을 하며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함께 이루어나가는 기숙 훈련생활이었다.
따라서 그 훈련기간이 힘들어 버티어내기 힘들면 그 자리에서 자퇴 신청이 가능했고 즉시 퇴교하여 대학에 입학했다는 청춘의 즐거움마저 거두어들여야 하는 아픔마저 가져야 하는 환경이었다.
당시 항해와 기관 두 개의 승선학과에 각과 50명 정원으로 100명의 가입학 신입생으로 뽑혔던 우리들이었지만, 한 달간의 훈련이 끝나고 났을 땐 이미 80여 명으로 줄어들을 정도의 고달픈 훈련생활이었다.
이런 게 대학생활인가? 하는 은근히 투덜대는 마음 가짐으로 대하기도 했던 이런 훈련이 가능했던 이유로는 <사관 선원으로 승선함> 자체가 국가의 해군 예비원으로서 국가 비상사태 발생 시 직책에 따른 해군 장교로서의 계급을 받고 국가의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입학자격 요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승선 생활을 계속한다는 자체가 국가 비상시에는 즉시 전시 동원에 응해 해군으로 소집될 수 있는 예비원이라는 뜻으로, 계급도 승선 연한에 따라 함께 승진한다는 내용으로 알리고 있었다.
하나 시간이 흘러 우리가 졸업할 무렵에는 현재의 해군 ROTC로 정착되어 현역으로 소집되어 근무하는 일로 돌아섰던 것이다 - 현재는 예전과 같이 병역특례로 승선하게 되는 길과 해군 ROTC를 지원하는 두 가지 길로 나뉘었음 - 이런 틀을 위해 한 달간의 가입학 기간에는 아침 6시 기상, 22시 취침의 고달픈 훈련생활을 하며 한 많은 아리랑 고개의 구보나 얼차렷, 봉래산 등반, 광복동 거리 왕복구보등 뜀박질 위주의 직각보행, 3보 이상은 구보 등으로 모든 참여 학생들은 최소한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몸무게 중 몇 킬로그램은 줄어든 후에야 입학식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 한 달간에 배운 것들 중, 두고두고 잊을 수 없고,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니 남아있는, 어쩌면 뱃사람으로서의 몸과 마음을 만들어 가지게 한 기초로 느껴지는 일이 있다. 훈련 중 우리들 훈련생 전체의 이목을 집중시켜서 한 곳으로 모아들여야 할 경우 등, 언제나 다 함께 똑같이 복창하며 목소리 다하여 외쳐야 했던 <해대 정신 5개 조>라는 학훈과, 오와 열을 이루며 행진 중이면 수시로 군가와 같이 부르던 7절로 이루어진 해대 요가라는 기숙사가가 그 일이다.
학훈으로 통용되던 해대 정신 5개 조나 기숙사 가인 해대 요가 모두를 지금에 와서 웅얼거리며 곰곰이 음미해 보면 그 구성이나 내용에 조금은 일제의 잔재가 스며든 듯한 느낌을 갖게 하는 어딘가 비감하고 처연함마저 드는 딱딱한 어귀를 어렵사리 찾을 수도 있지만, 당시 광복과 한국전쟁까지 치른 나라에서 맨주먹만이 무기로 남은 형편에서 남 앞서 살아날 길은 해운만이라고 외치고 싶었던 우리 선배님들의 한결같은 깊은 뜻이 흘러 넘침도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외치기만 하면 모두 다 함께 목청껏 소리쳤던 <해대 정신 5개 조>는 이렇다.
1,2 항목에서 사람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덕목과 방향을 제시하였고, 3,4 항목에선 뱃사람으로서 뚜렷한 직업관을 가지고 생활해야 하는 우리들의 앞날을 강조하며, 마지막 5 항목에선 이런 모든 것을 이루기 위해선 우리의 배움과 배움터가 화기애애 한 터전에서부터 생겨남을 강조한 내용이다.
정식 입학 전부터 이런 뜻을 가진 학문을 구호로서 수도 없이 외치며 마음을 가다듬었던 우리들의 학창생활 시작이었고, 그 후에 이어진 해상 승선 생활이었으므로 알게 모르게 우리들 가슴에 아로새겨지고 머리에 인으로 박힌 문제의 해결책들은, 현장에서 닥치게 된 모든 일을 그냥 밋밋한 현실로 풀 죽어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닌 끊임없는 용기와 정확한 판단을 요구당하면서, 최선의 옳은 참여와 실천을 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런데 세월호 침몰로 인해 땅으로 곤두박질된 선장이란 직책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멸시를 만나게 되면서 어떻게 그런 일이, 왜? 발생되었는가? 어디서부터 설명하고 이야기할지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이 모든 의문이 한 사람의 지휘관이 행한 그릇된 판단에 의한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기인하여 커졌음을 보면서, 한심함을 책잡는 의분이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지만 참아내며 근원을 살펴보기로 한다.
보는 관점을 작은 범위로서는 선상의 일이지만, 모든 범위를 통틀으면 세상에서의 일이 되는 데, 이 세상 모든 일들은 그 일을 알맞고 정확히 실행하고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는 관련된 세상의 단체나 조직이 자체 매뉴얼
을 성문화이던 아니든 간에 전부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며 시작해야 될 것 같다.
모든 조직은 당연히 그 조직을 지탱하기 위한 방편으로 독자적인 매뉴얼을 가지게 될지라도 그 매뉴얼이 일반 사회적인 안전에 위배될 소지가 있을 경우에는 한발 물러서 안전을 확실히 보장할 방안이 첨가된 매뉴얼로 보강해가며 유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생활이 복잡다단해지며 이 지켜야 할 매뉴얼에 따를 경우 손해나 그에 준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고 여기는 풍조가 세상에 만연하면서, 매뉴얼을 벗어난 편법의 방법을 택하여 일을 진행하여 편하게 이익을 취하려는 악습 또 한 늘어난 것이 현실이다.
결국 이 악습은 학연, 지연, 혈연 등 모든 사회적인 인과관계의 고리와 부화뇌동하여 금전적인 이익 등과 어울리는 주객이 전도된 상황으로까지 변질되면서, 꼭 지켜야 할 일에서 벗어난 경우를 당해서도, 당연한 해결방안이 그뿐인 양 우리 앞에서 행세할 것이고, 이렇게 평상을 벗어난 일의 확산은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사고가 되어 우리를 찾아오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상식에 기초한 매뉴얼을 벗어난 잘못된 비상식의 관행이 판을 치는 세상은, 안 되는 것 없고 또한 되는 것 역시 없는 사회로 되어,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 평범한 생활인의 삶을 피곤하고 어렵고 때로는 서럽게 까지도 만드는 게 아닐까?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같지만, 세월호의 경우를 봐도, 출항 전 안전항해를 이루기 위한 제반 매뉴얼상의 체크리스트대로 육해상 관련부서 모두가 정확하게 점검하고 그대로 따랐다면 항해 중 이런 변은 결코 시작조차 안 했을 것이고 또 배가 항해 중 심상치 않은 조난 상태로 변했을 때도 퇴선을 위한 규칙을 정확히 따르기만 했어도 이렇게나 많은 희생자를 양산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사고 중반부 구조에 개입한 부서에서도 분초를 다투는 상황에 대처한 발 빠른 제대로 된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매뉴얼대로 행동만 했어도 역시 지금 보다는 많은 인명을 살려내었을 것이다.
그런 잘못된 관행을 대표적이게 보여주는 세월호 참사 이건만, 전 국가적인 뒤처리 사항은 아직도 왈가왈부하며 풀어낼 길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후유증으로 계속 남아준 슬픔 역시 어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대부분의 우리 국민들은 답답한 심정에 한숨만 쉬고 있는 꼴이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 같은 늦은 감이 아직까지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상황임을 인지하여 우리 모두는 스스로의 입장에서 최선의 방향을 향한 가야 할 길을 만들어내야 할 것이다.
모든 당사자들은 -아니, 이제는 너나없는 전 국민이 자신의 자리에서 함께하여, 자신의 이익이나 체면은 접어두더라도, 사회에 총체적으로 만연되어 있는 해당 매뉴얼을 벗어난 일들에 대한 철저한 점검 후 보완 완성하며 자기반성도 같이 이뤄야 할 것이다.
각자 각 분야에 따라 제대로 된 가치를 함유한 당연한 매뉴얼로 보강, 계발할 수 있도록 연구 노력하며 부당한 예외에 대해선 정확히 '아니오'를 말할 수 있도록 하자. 이 일은 우리 국민 전체가 물심 모든 방향에서 참여하여 어쩌면 국민성 개조의 참 계기가 만들어져, 대한민국의 안전 방향이 거듭 태어나는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으면 바라는 마음 간절한 것이다.
한창 승선근무 중이던 시절 나는 <제자리로 돌려주기 운동>을 제창하여 <작업에 사용한 공구나 물건은 사용 후 제자리로 돌려주자.>는 모든 일의 뒤처리 과정에서 잘못된 습관을 고치어 일의 능률과 안전을 도모, 실천해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그때의 생각을 오늘에도 다시 상기하여 본다. 그래서 모른 척 팽개치거나, 눈앞 이익에 빠지어 저버리고 있었던 생활의 매뉴얼-세상사-에 대한 입장을 정식과 순리로서 되돌려 제자리를 찾도록 정리 확정해 보자는 제안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제 작게는 선장이었던 입장으로 돌아와서 그간의 잘못을 바르게 수정할 방법을 찾아보며 이 나라 선원들이 가지게 되었던 모욕감에서 벗어나 선원으로서 가야 할 길을 자부심과 함께 재출발할 수 있게 헤아려 본다.
아니 그런 선장 같지 않은 선장이 왜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심정에 마냥 서럽던 마음을 접어주며, 이제는 세계 속에 우뚝 선 우리나라 해운의 모항인 부산항을 다시 찾아가 보기로 마음먹었다.
부산 영도에 들어서서 태종대 쪽으로 가다 보면 저 멀리 높다란 흰 첨탑 모양의 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순직선원위령탑이다. 세계의 바다를 개척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순직한 선원의 영령을 봉안하여 그 넋을 위로하고 기리기 위해 전국 해운 노동조합에서 1979년 4월 12일에 2,681위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건립된 구조물이다. 2020년 현재, 9,252위의 순직선원들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니 1979년 이후 6,571명의 선원들이 더 바다에서 세상을 떠난 셈이다.
해마다 발생하는 순직 선원들을 계속 봉안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이곳을 참배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세월호 선장 같은 선장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 것일까? 의문을 품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그곳에 가면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오롯이 버려야 했던 살신성인의 덕목을 실천한 우리들의 선배요 동료였던 선원 여러분을 뵐 수 있으니 말이다.
혹시 여러분들께서 부산을 찾는 관광객이 되었을 때 한 번쯤 마음먹고, 살신성인이란 참 의미를 보여주는 의인들의 영령이 모셔진 이 곳을 참배하여 주시기를 정중히 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이나라 해운에서 가장 앞장서 달려온 우리 선원들의 사기를 앙양시키고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책임감으로 살신성인하는 선원상을 만들어 내준 틀이 완성된 것이건만.... 옥에 티도 필요한 악인 것일까?
다시 한번 더 <해대 정신 5개 조>를 목청껏 소리치던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중 네 번째인 <4. 우리의 각오는 바다의 매골>을 새삼 음미해본다.
너만의 매골이 아닌, 나의 매골이란 점을 강조한 우리의 각오가, 오늘도 세계의 바다를 누비는 나의 동료 후배들의 마음속에 고스란히 전달되어, ‘死卽生 生卽死’ (죽기를 다하면 살 것이요, 살기만 도모하면 죽을 것이다.)와 더불어 함께 지녀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다들 아시다시피 死卽生 生卽死(사즉생, 생즉사)라는 말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을 물리치며 나라를 구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좌우명(座右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