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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pr 04. 2019

어제는 MAY DAY 신호도 받았네요

MAT DAY-조난신호-

.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식구들께


브라질을 출항하고 나서 계속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날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거의 폭풍 수준의 바람이 불면서(42노트, Km로는 77Km), 선수로 파도가 넘실거리며 넘어오고 있죠. 


이 정도 되면 열대성 폭풍 수준인데 그나마 선수 쪽으로 바람을 받아서 흔들림은 덜한 편입니다. 


 어떤 뱃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하는 일을 인생에 비유하던데, 바람 한 점 없고 평안한 날은 배를 타면서 거의 만나본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결국 배를 타는 이들의 팔자가 꽤나 사나운 것을 대변하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늘 파도와 바람을 맞으며 사는 이들, 그것이 결국 뱃사람들의 숙명이라는 얘기겠죠.


 어젯밤에는 MAYDAY신호를 받아서 일순 긴장했었습니다. 

저희와 위도는 거의 비슷하지만 경도에서 1000 마일 정도 떨어져 있던 곳의 타이완 어선에서 구조신호가 날아온 것이죠. 


 직접 받은 것은 아니고 남아공의 지구국이 중계해서 릴레이로 받은 것이긴 합니다만 어디선가 죽음과 맞닥뜨린 뱃사람들의 운명이 이곳까지 느껴져서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국적도 다르고, 말도 다른 이들이지만 뱃사람이라는 운명으로 묶여있는 그들의 무사생환을 마음속으로 기도했습니다. 


 언젠가 아버지께서 뱃사람들은 발아래에 지옥을 딛고 사는 이들이라는 말씀을 해 주신 적이 있었죠. 그만큼 위험하고 서글픈 우리들의 운명이지만 모쪼록 다들 그 운명이 끝나는 마당에는 부디 해피앤딩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해봅니다.


 이곳까지도 서울의 이상 기후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때아닌 물폭탄에 강남이 초토화되었다는 소식부터 우면산의 산사태 이야기에 북상하고 있는 태풍 소식까지...

눈 씻고 찾아봐도 죄다 걱정스러운 일들 뿐이라 어떤 것을 화제로 꺼내야 할 지도 난감한 상황이네요. 

이래저래 갑갑한 상황에 꾸지리한 날씨의 연속이지만 그래도 힘내 보자고 말을 해야 할까요. 

아니면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이 상책이니 지금 상황을 즐겨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어쨌건 요즘 들어 불어닥친 희한한 기상이변이 어서어서 제자리를 찾아 더 이상 피해당하는 이들 없이 잘 마무리되고 이번 여름이 지나가 주길 바라봅니다.


 싱가포르까지의 여정은 의외로 빨리 도착하게 될 듯싶습니다. 

그래 봐야 어디까지나 ETA지만 지금 속도로(이런 악천후 속에서도 꿋꿋하게 12~13노트는 내주네요) 28일 정도에는 도달할 듯싶네요. 그것도 인도양에 접어들었을 때 역조의 영향을 최소한 적게 받는다는 전제가 붙게 되겠지만요.  


 막내에게 부탁한 하드 채우기는 어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바쁘다는 것 알지만 차일피일 미루면 결국 빈 하드로 받게 될 듯싶은데, 배에 있는 모든 선원들이 그 하드만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것 좀 알려주세요. 


 이번 중국에서 선장님 이하 여럿이 하선하게 되는데 아버지께서 또 이곳으로 오시면 어떨까 잠깐 생각해봤습니다. 

남미에서 동남아로 넘어온 데다, 몬순시즌에 돌입한 지긋지긋한 인도는 피할 수 있고 컨디션도 아젤리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좋으니 말이죠. ^^


하여간 할머니, 엄마, 형, 막내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고, 늘 건강하시라고 좀 일러주세요. ^^


이상, 대서양을 황천 돌파 중인 둘째였습니다. ^^


2011년 8월 4일,

둘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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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마당에 피어있는 금낭화의 모습

 둘째야!


지난봄 너를 다시 바다로 떠나보낼 때쯤에 찍어 두었던 우리 집 마당가에 피어있던 금낭화의 모습이다. 


그 험한 파도 속의 너를 언제나 잊지 않고 있다는 우리 가족들 성원의 목소리가 그 꽃 하나하나에 들어 있다고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보내는 것이다.


 네가 결코 높은 파도와 바람이라고 주눅 드는 아이가 아니란 건 알고 있지만, 순간순간 찾아오는 두려움이나 어려움에 고통스러운 마음 또한 갖지 않을 수 없는 뱃사람이란 것도 알기에 작은 종소리를 내어 귀를 즐겁게 해 줄 것 같은 금낭화의 모습에다 우리 가족 모두의 목소리를 담아 보내는 기분으로 덧붙인 것이지......


 차분한 마음으로 모든 일에 대처한 승선 생활을 하고 그 안에서 네게 필요한 생의 즐거움과 간절한 의미를 계속 찾아내 주기를 바란다. 


 아울러 네가 부탁했던 일에 대해선 막내가 이미 일을 잘 진행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추후 필요한 경비는 네가 연가로 귀국한 후에 처리해 주면 될 거다.


 그리고 뱃사람의 생활을 너무 운명적이고 힘든 것이라고 만 생각하지는 말거라. 

우리 뱃사람의 생활은 대부분의 인생들은 할 수 없고, 알 수 없는 특이하고 모험적이어서 한 번씩 자신의 일에서 이루고 난 후의 성취감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을 동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대서양의 파도를 헤치며 -아니 이미 인도양에 들어선지도 모르겠구나-생활하고 있는 너에게 내가 경험했던 모든 일들에 대한 기를 고스란히 전달하고 싶은 마음을 보내며 한편으론 지금 서해상을 북상 중인 태풍 무이파의 소식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 태풍은 초기에 생겼을 때의 정보만을 듣고 내가 우려하였었던, 우리나라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으로 여기지만, 오늘 정오쯤 들어서면 백령도 서쪽 150 킬로미터 해상을 통과해서 북상한다는 기상 특보가 나와 있다. 아마 지금쯤 가장 가깝게 지나는 셈이겠구나.


 그러다 보니 이곳은 빠르게 흐르는 낮은 구름들로 하늘이 메워져 있고 이따금 수초 간 불어대는 이상한 바람에 우리 집 마당 가의 나무들이 한 번씩 미친년 머리 풀어 흔들어 대듯이 휩쓸리는 현상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태풍의 구역과 어느 정도 가까이는 있지만 역시 심하게 위험할 정도의 컨디션은 아니란 점을 알게 해 주니 크게 걱정은 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필요한 외출은 삼가기로 하여 집 식구 모두는 집에 있단다. 


 단지 네 형이 나간다고 했을 때는 말리지 않았는데, 그건 그가 출근하는 곳이 우리 집 보다도 더욱 동쪽에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북반부에서 태풍의 진행방향을 놓고 볼 때 위험반원인 우반원에 들어 있는 곳인 이곳에서 북상 중인 태풍의 중심과는 그만큼 멀어진 셈이라는 얄팍한 믿음이 작용했기 때문이겠지... 


 사실 태풍과 접근할 때에는 가깝고 멀다고 표현할 수 있는 다만 몇 킬로미터라는 작은 차이의 거리라도 받게 되는 위력의 차이는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기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지만 너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한 번쯤 멜랑꼴리 한 기분도 가질 수 있는 대양에서의 아주 조용한 순항의 기쁨을 충분히 많이 맛보라고 축원하며 오늘의 집안 소식은 여기서 끝낸다.


ps:태풍 무이파는 1109호 태풍으로 마카오가 제출한 이름으로 MUIFA라고 서양자두 꽃을 의미한다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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