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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y 09. 2019

케이맨 제도를 지나며

사진:부두에서 작업 중인 CK ANGIE호


Photo by Skyraider


  본선은 현재 케이맨 제도를 우현에 끼고 멕시코만을 향해 북서진 중입니다.


케이맨 제도는 요즘 우리나라의 돈 깨나 있는 있는 이들 중 질이 좀 안 좋은 이들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조세 피난처로 잘 사용하는 곳으로 유명하기도 한데 전에 어느 뉴스를 보니 이곳을 거점으로 만들어진 PAPER COMPANY 숫자가 50만 개가 넘는다는 소식이더라고요. 


우리나라 제주도보다도 작은 섬에 50만 개의 회사라. 이런 일들을 보면 정말 대한민국에서 세금 내고 사는 것이 한숨이 나올 지경이죠. 유리 지갑인 월급쟁이들만 쎄가 빠지는 나라로 느껴지니까요. 


만만한 이들에게는 꼬박꼬박 세금 거둬가고 듣도 보도 못한 이런 섬으로 도망간 이들은 잡지 못하는 왜곡된 세무구조가 오늘따라 점점 짜증스러워집니다. 


하긴, 그나마 배 타는 이들은 육상직들보다 세금을 덜 내는 편이니 스스로에게도 이런 짜증이 속 편한 소리로 느껴지는 점도 있습니다. 


  소식이 많이 늦어버렸네요. 지난번 메일을 적는다고 말씀드리고 바로 보내려 하다가 이런저런 일들로 마음이 뒤숭숭해져서 요즘 여유가 좀 안 나고 있었습니다. 


 이항사로부터 인수인계도 받기 시작했고, 11월 초에는 본선에 작년 11월 신조 인수차 올라왔던 모든 선원들이 - 타수 한 명만 빼고 - 모두 하선할 터라 밀린 서류와 인수인계로 전체적으로 배가 뒤숭숭한 분위기입니다. 



게다가 이번 역시 미국으로의 기항이라 PSC는 지난 항차 미국 기항 시 잘 수검하여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다른 것들 때문에 골머리가 아플 지경이네요. 


 예전에는 기항하기 참 좋은 곳이 미국이었다는 본선 직장들의 말이 꿈처럼 느껴집니다. 정말 그런 적이 있었나 싶은 것이죠.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지금은 좀 나으셨나 모르겠네요. 계절이 바뀔 때 한 번은 감기, 몸살로 곤욕을 치르시는데 생신 때부터 지금까지면....-_-;; 병원엔 잘 다니시나 모르겠지만 아버지께서 꼭 어머니 끌고서라도 다니세요. 말 안 하면 잘 안 가시는 분이시니까요. 


 서울도 완연한 가을로 접어드는 모양입니다. 찬 바람이 불어서 지난 더위 날리고 멋진 결실만 가져다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감기, 몸살 따위는 가져오지 말고. -_-;; 이번 미국에서 어머니, 아버지 영양제도 좀 사둬야겠습니다 - 이미 주문했지만. ^^


요즘 형도 목공일은 잘 되고 있는지, 막내도 여전히 일 열심히 하고 있는지, 할머니는 내내 건강하신지 그것도 계속 궁금합니다. 


8월부터 오른다던 월급은 여전히 안 올라가는 상황에서 - 차라리 말을 말던가! -_-;; -

요즘 슬슬 우울해지려는 모드인 저보다는 다들 좋은 상황이실 듯. -_-;; 


 교대해서 하선한 이들이나 승선하는 이들에게도 '곧 좋은 소식(월급 인상) 있을 것.'이라고 신나게 약을 치더니 11월이 코앞인 지금까지도 월급 오른다는 얘기는 깜깜무소식입니다. -_-;; 덕분에 배에 있는 모든 선원들도 이제 거의 포기하는 분위기이지만 예전 같이 타던 동료들이 회사를 옮겼다는 소식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분위기는 계속 다운되는 상황이죠. 


 저야 아직 일을 배우는 입장이라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의 경우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하여간, 이런저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고 신나게 배 타고 있으니 너무 걱정 마시길. ^^


  이제 50여 시간 후면 미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도착하면 다시 인터넷 전화드릴게요. ^^

모쪼록 우리 가족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건강이 함께하길 기원하며.


2012년 10월 22일,

케이맨 제도를 지나는 CK ANGIE호에서,  둘째.

어쩌다 발라스트 컨트롤 룸에 모이게 된 본선 사관들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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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라도 너한테서 오는 소식은 기쁘고 반갑구나.


 네 편지의 서두를 보며 예전 나의 승선 시절을 잠깐 추억해 본다. 


어쩌다 잔잔한 바다 위를 지나칠 경우, 부근에 아름다운 섬이라도 있을라치면 열심히 쌍안경을 들어 살펴보면서 때로는 그곳에서 아무런 제약 없는 편한 마음 되어 자연 속에 묻힌 삶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도 종종 가져보며 항행하기도 했었지. 마치 노후가 되면 귀향하려는 꿈을 가진 사람처럼...


 근데 너는 케이먼 제도를 가까이 지나가면서 지금 그곳을 기준해서 벌어지고 있는 추악한 인간들의 욕심이 난무하는 꼴들이 보기 싫으니, 비난하는 마음부터 드는 모양이구나.


 당연히 나 역시 끝간데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의 욕심이 빚어내는 그런 행태를 너와 같이 비난하는데 동조하게 되는 심정임이 틀림없기는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자신과 주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의 잘못된 욕심이 빚어내는 일이란 걸 깨우쳐내어 공수래공수거의 의미를 새삼 반추해 준다면, 자신도 알고 이웃도 배려하는 참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닐까? 다시 한번 더 생각을 추슬러 본다. 


 그냥 쉽게 생각해도, 한때는 당시 내가 받던 봉급에서 제대로 떼어 낸 세금으로도 몇 사람의 초급 경찰공무원의 급여도 될 수 있다는 계산을 하며 자신이 기여하는 일에 대한 뿌듯한 자긍심마저 품으며 살아왔었다. 


 그런 우리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한강의 기적을 이야기하며 세계 속에서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현실로 나타나 준 게 아닐까? 굳게 믿어보는 프라이드 마저 담긴 심정이란다.


 현실에서의 네 입장에서 어느 정도까지 이해가 가능한 상황일지는 그냥 짐작으로 점쳐보지만 절세라는 명제를 앞세웠지만 결국 탈세로 빠져든 이들의 서류상 보호처가 되어 돈을 벌어드리는 그들 조세피난처는 필요악의 한 가지 유형으로 우리들 앞에 남아있다고 여겨진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네가 이 배에 승선하고 지난 기간이 배를 타면서 가장 힘든 시기를 이루는 4~5개월이 지나가고 있구나. 이런저런 소문이 마음을 흔들고 피곤하게 만들어 어수선한 분위기가 골치를 아프게 하는 속에 가장 조심해야 할 사항은 부화뇌동을 하여 그런 분위기들에 빠져들어 같이 어울리는 것이란다.


 따라서 언제나 꿋꿋하게 네 중심을 잡아 결코 분위기에 휘둘리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며 이는 물론 건강도 함께 거들어서 하는 말이다.


 이제 엄마도 거의 다 건강을 회복하였고, 다른 사람은 아픈 사람이 없으니 집에 있는 사람들의 걱정은 하지 말거라. 


 아울러 영양 제니 뭐니 하며 너무 준비하지 않아도 될 만큼 할머니, 아빠, 엄마의 건강도 괜찮으니 부산스레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는 28일 네 생일날 모두가 너를 생각하며 미사 참여할 것이니 너도 6시 새벽 미사에 참예하는 기분으로 그날 하루를 지내기 바란다.


 이런저런 소식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고 신나게 배를 타고 있다는, 너의 전언에 쓸데없는 걱정일랑 붙들어 매 놓기로 하며 오늘은 여기서 작별의 인사를 보낸다.


 멋진 너의 몸매가 깃들인 사진 한 장 보내주었으면 바라고 있다. 엄마의 기대에 찬 부탁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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