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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1004)의 기다림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가야 하는 길

by 전희태
DS0042(7310)1.jpg 잠깐 지나가는 스콜과 함께 나타나는 무지개. 천사의 미소가 이럴까?



앞으로 우리 배가 이틀거리쯤 항해하면, 도착될 위치를 미리 선점한 채, 마치 우리 배에게 무슨 큰 은혜나 베풀 수 있는 천사라도 되는 양,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는 모습을 가진 열대성 저기압(TD)의 현재 크기가 천사(1004 hpa)였다.


물론 공식적으로 누가 그렇게 이름을 붙이자고 제안한 사람은 없지만 기상도상에 우리 앞에 나타나 있는 형태가 1004 hpa 크기로 표기되어 있어, 그 모습을 보면서 무심히,

-1004로구먼! 하는 기압의 크기를 말한 것이 그대로 천사가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진짜 천사 같은, 천사의 역할을 하고 떠나가 주었으면 바라는 마음이 구름처럼 일었었다.


그러나 바다 위에서의 천사는 이미 천사이기를 거부하는 열대성 저기압의 속성대로 몇 시간 지나지 않으면 기압을 1004 아래로 떨어뜨리며 슬슬 진면목을 보이려 할 것이다.


회사도, 우리 배도 이미 변화하는 그 열대성 저기압의 동태를 주요 사항으로 받아들이며 열심히 주시하기 시작하는 필리핀 동쪽 태평양은 지금 여름 태풍 시즌이 한창이다.


이때 즈음이면 이 부근에서 태풍의 씨앗으로 발생하는 열대성 저기압은 서진, 내지 북서진으로 방향을 잡고는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낸다.


짧게는 하루에서 사흘, 길게는 닷새나 일주일을 지나면 어느새 필리핀, 대만,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와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치는 태풍으로 발달하면서, 거론된 모든 나라와 그 부근 해역을 항해하는 선박에게 커다란 공포감을 심어 주는 외눈박이 괴물이 되는 것이다. -태풍의 특징 중 하나에 눈이 있는 것이다.-


사실 배에서는 태풍이 얼마만큼 지나가 버린 곳을 안전한 거리를 두고, 그야말로 태풍 일과 후의 해역을 졸졸 따라나서는 형식이라면 안전 항해를 이루는 데 가장 상책은 되겠지만, 항해의 완성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약점 또한 있다.



태풍 피항의 여러 방법을 염두에 굴리며 조심스레 북상하는데, 천사는 움직거림도 미적거리면서 힘의 비축은 계속 늘이고 있는 전형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반적으로 태풍은 발생한 구역에서 어느 정도의 속력으로 서진을 계속하다가 점점 진행 속도가 떨어져 그 자리에 머물러 우물거릴 때쯤이면 부근의 수증기와 잠열을 흡수하면서, 몸 키우는 작업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커진 몸체를 뽐내듯 새로운 방향으로 돌아서며 달리기에 뛰어들면, 이미 한 단계 더 부풀어진 열대성 폭풍(TS, STS)(주*1)이나 그 이상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렇듯 태풍으로 변신할 화려한 꿈을 키워가며 그 자리를 쉽게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멈추고 있는 격상되어 가는 열대성 폭풍을 만나게 되면 될수록 아니 절대로 접근하려는 시도는 체념하는 게 현명한 항해사라고 나는 믿고 있다.

더욱 발달하면 결코 천사로 남을 수가 없는 악마의 얼굴을 가진 괴물로 변환하는 것이 바로 태풍이기 때문이다.


아직 초보 단계인 열대성 저기압으로, 천사로, 남아있는 시간대에 우리 배가 빨리 지나쳐 갔으면 좋으련만,

우리 배의 속력으로서는 온 힘을 다해도 앞질러 빠져나갈 수는 없고 또 그럴 실력은 아예 처음부터 기대할 수도 없는 것. 그나마 충분한 거리와 시간을 두고 피할 눈치나 살피면서 계속 달리고 있다.


천사여!

더 이상 우리를 기다리지 말고 어서 너의 갈 길로 빨리 들어 서거라!,

그리하여 우리 스물두 명의 선원들이 무사히 귀항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가족들과 재회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너 천사의 착한 의무가 아니겠느냐?


천사의 기다림을 마다하며 북상하는 뱃길이 너무나 우울하게 느껴지는 하루이다.

어느새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앞길 한 모퉁이에서 우물거리며 조금씩 커가던 열대성 저기압 천사(1004 hpa)는 이미 어엿한 9907호의 번호를 받은 태풍 OLGA로 되어 북위 25도 부근에 머무르고 있다.



주*1 : 태풍으로 크기 전 발생 단계부터 표기되는 기상도상에 표시되는 약칭으로

TD(Tropical Depresion, or Distervance, 열대성 저기압)

TS(Tropical Storm, 열대성 강풍)

STS(Severe Tropical Storm 열대성 폭풍)등의 단계를 거쳐

TW(Typhoon Warning 태풍경보)으로 된다.

보통 STS급부터 태풍으로 취급되며 번호 부여는 TD후반기에 시작되고 STS 쯤에서 이름마저 붙여진다.

(태풍 번호는 연도의 후반 두 숫자와 그 해 몇 번째 발생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두 자리 숫자가 합해서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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