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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은 피하고 보기

결코 가까이할 수 없는 태풍

by 전희태
이렇듯 해상상태가 거칠어지기 시작하면 .....



선장의 결단을 촉구하는 고뇌가 반복되는 여름철 태풍 시즌이 찾아왔음을 절감하며 오늘을 연다.


태풍 9907호 OLGA는 그 발생을 기상도 상에서 감지하게 만든 후, 우리가 그녀의 탄생 해역에 도착하기도 전에 멀어져 가는 모양새를 보여, 그야말로 우리 입장에서는 천사의 마음을 가진 태풍으로 영향 없음을 기뻐하게 만들어 줬다.


그래도 제 가는 길에서의 올가(OLGA)는 맹위를 떨치기 위한 모든 준비를 차근히 준비해 가며 오키나와 부근에서 북북서 진을 하고 있다.


그 무렵 8월 1일 새벽에, 또 다른 저기압 하나가 그 전날인 7 월 31일 오후부터 북위 13도 동경 147도 부근에서 1008 HPA로 자리매김을 하며 나타났다.


틀림없이 내일 오후나 모레쯤이면 열대성 저기압인 TD로 변해 9908번의 번호표를 달고 기상도의 화면을 화려하게 장식할 녀석이란 걸 확신하기에 선뜻 녀석의 진로 앞으로 나설 용기를 가질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내보내는 기상도들을 수신하여 해도실에 주-욱하니 펼쳐 놓고 판단의 자료로 삼을 때, 아직은 하루 정도 더 올라가도 최악의 경우 피항할 여지가 있다고 여기어 계속 주시하면서 원침로 대로 북북서진을 계속하기로 작정하고 브리지를 내려왔다.


몇 시간이 지나 가장 새롭게 접수된 기상도에서 녀석은 10 knots의 속력으로 서남서 쪽으로 진행하는 양상으로 그려져 나오고 있다.

그대로 진행된다면 내일 오후에는 우리와 조우할 것으로 예상되어 일단은 300마일 이상의 거리를 가지고 우리의 앞을 지나쳐 가주기를 관망하며 정선 대기를 명령한다.


녀석이 현재 위치에서의 양태는 태풍으로 크기 위한 전초 행동으로 여겨진다. 여기서 잠열과 수증기를 끌어 모아 크게 세력을 확장한 후 서서히 북서진을 시작하는 패턴이 지금 시즌의 통상적인 태풍 루트이다.

얼마나 그 관례를 따라 행동하는가를 지켜보며 어느 정도 서남서진한 후 터닝을 하여 북서진 쪽으로 바뀌느냐에 따라 우리 배가 오히려 남쪽으로 도망가야 하느냐, 아니면 지금 자리에서 그냥 버티고 있다가 완전히 우리를 영향권에서 빼어 줄 때, 갈 길로 다시 복귀해야 하는가를 결정할 일이다.

우선은 녀석이 더 이상 심술을 부리듯 남쪽 편에 가깝게 접근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1일 새벽 4시에 KS WEATHER에 본선의 침로상 오른쪽 한시 방향쯤 300 마일 정도 거리에 발생하여 머무르고 있는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운 그 저기압의 동정과 함께 추천 항로를 요청하였다.

저기압의 동정을 우리 배가 예정대로 그냥 지나치어 가면 바람을 6-7 (주*1) 정도로 조우하며 항진하게 될 것으로 알려 온다.

마침 그때 일본의 기상도는 1006 hpa로 2 hpa가 낮아지어 우리 배의 침로를 향하여 그대로 다가오는 형세인 서남서진 방향 10 KNOTS 속력으로 움직인다는 아침 여섯 시 40분 해상 표면 상황 기상도를 발표하고 있다.

잔뜩 흐린 날씨에 빗방울도 흩뿌려 치며 폭풍이 다가올 전조를 보이는 해상 상황을 감지하며 또 그 움직임이 우리를 향해 찾아오듯이 서남서진 10 knots로 움직인다는 일본 기상도의 해석을 보면서 섣불리 북북서진의 코스를 고집하며 그대로 항행을 계속할 수가 없어 그 자리에서 드리프팅을 하기로 작정하여 0745시 기관 정지를 명한 것이다.


본선이 원래의 예정 항로대로 올라가면 지금은 저기압이지만 며칠 내로 폭풍-태풍이 되어 북북서 진으로 본선 꽁무니 쪽으로 달려 올라올 것이 뻔한 상황이다.

뛰어나지도 못한 속력으로 그렇게 앞장섰다가 태풍이 한창 기승을 부리는 시점에 다시 추월을 당하는 일이라도 생기는 건 생각하기조차 끔찍한 일이기에 과감히 기관 정지하고 관망하기로 한다.


선장의 권리요, 의무이기도 한 이런 결정을 제 혼자 내리기 위해 벌써 며칠 전부터 잠 못 이루는 고뇌를 가지고 씨름하고 있든 선장의 마음을 그 누가 알기는 할까?


주*1 : 뷰포트 스케일 6, 7 이면, 풍속이 각각 초속 10.8(13.8)~13.9(17.1) 미터 정도 바람이 불고, 파고는 3(4)~4(5.5) 미터 정도의 해상 상태임을 표시하는 해상 기상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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