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파에 오들오들 떨면서 항해하던 세월
어제저녁까지 우리 배한테 속력이 떨어져서 점점 가까워지던 크레인을 장착한 DWT 20,000톤 정도 되어 보이던 화물선을 아침나절 브리지에 올랐을 때 살펴보았지만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고 있다.
-어제 저 앞에 있던 배 뒤로 쳐진 모양이지? 하고 당직사관에게 물으니
-아닙니다. 우리보다 빨라져서 앞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한다.
어제저녁 거의 다 따라잡았을 무렵 본선의 발전기에 이상이 있어 두 번 정도 기관을 저속으로 변속하고 항해했을 때에, 그 배는 날씨도 좀 회복되고 하니 그대로 속력이 붙으면서 앞서 버린 모양이다.
그때만 해도 심한 북서풍의 몬순(계절풍)의 횡포에 선수를 끄떡 들었다가 흰 포말을 뒤집어쓰며 분주한 몸놀림을 하더니, 고기압이 가까이 까지 밀려 내려오며 평온해지기 시작하는 날씨 따라 기가 죽어 있던 기관이 활발히 운동을 재개하여 속력이 증가하면서 우리를 다시 떨어뜨리고 앞서 달려간 모양이다.
어지간한 황천을 만났을 때 항해하는 형편이 달라지는 작은 배와 큰 배의 차이가 대충 그런 것이다.
60년대 말경 어느 초 겨울의 날.
나는 대한해운공사의 묵호호에 1항사로 승선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묵호항에서 당시 우리나라의 수출품으로 큰 몫을 차지하고 있던 S양회의 포대 시멘트 4,000여 톤을 싣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항을 향해 항해했던 일이 있었다.
동지나해를 들어서며 만난 겨울철 계절풍으로 인한 파도에 Bottom Heavy 상태로 짐을 싣고 있던 우리 배는 심한 롤링에 시달리다가 그만 선체 외판에 약간 금이 가는 일을 당해 선창 내로 해수가 스며들어 싣고 있던 시멘트를 수침시키는 사고를 당하였다.
다행히 그렇게 물이 스며든다는 점을 일찍 발견하여 펌프로 수침된 물을 뽑아내니 들어오는 양보다는 배출되는 양이 많아, 최악의 퇴선을 할 경우는 없을 것이란 판단 아래 그대로 목적지까지 속항 하기로 결정하고 항해하게 되었다.
이제 수시로 선창 내 수침하는 물의 양을 측심하여 알아내는 당직까지 덧 붙여진 항해당직을 서며, 마침 대만 옆을 항해하고 있을 때, 아직도 까딱대는 우리 배의 선체 운동을 비웃듯이 늠름한 모습으로 유유히 지나치던 커다란 상선-아마도 만선이 된 살물선(Bulk Carrier)이 었을 거다.-을 보며 속으로 얼마나 부러워했던지.....
지금도 그날 그 뿌연 날씨 속에 전혀 흔들리지 않는 것 같은 모습으로 지나가던 그 배의 실루엣이 어쩌면 나에게 그런 커다란 배를 타는 뱃사람의 길을 은근히 걸어가도록 리드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4천 여톤의 화물을 싣고 지금 배안으로 물이 스며드는 수침 사고까지 안고 항해 중인 힘든 작은 배인데, 그 배는 수만 톤, -아니 10만 톤 넘는- 단위의 화물을 싣고도 끄덕하지 않고 가는 모습이 얼마나 부러웠던지...
훌쩍 건너뛰어 힘든 현재의 작은 배를 떠나 여유롭게 달리는 큰 배로 바꿔 타고 싶었던 심정이 굴뚝같았기에 목청껏 소리쳐서 불러서 우리 형편을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것 같다.
그 후 배를 타는 연륜을 쌓아 가면서, 항해 중 만나게 되는 작은 배들을 보면서, <고무신짝 만 한 배>라고 농담의 표현은 하면서도, 한 번씩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면, 유심히 연민을 가지고 살피며 지나치는 여유로운 마음도 가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