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항해에 청량제 역할을 하는 행사
오후에 안전 운항을 기원하는 적도제를 지내기로 선내 공고를 했다. 돼지 머리 두 개를 푹 삶아서 사용토록 했는데 한 두는 푹 삶겨서 콧잔등 위의 살이 모두 물러난 상태이고, 다른 한 두는 그 보다는 나아서 이목구비가 그런대로 남아있는 모습이었다.
아침부터 열심히 삶는 것을 관장하던 조리장이 푹 삶아진 것은 브리지로 보내고 제대로 살이 붙어 있는 것은 기관실로 보냈단다.
비록 그들을 앞에 놓고 원하는 사람은 절도 하겠지만 어차피 먹을 때는 잘 삶아진 것이 나은 것이니, 자신이 먹는데 동참하게 됨을 감안하여, 보기보다는 먹기가 좋은쪽를 택했다며, 브리지 쪽 적도제 행사에 동참하러 올라와서 웃으며 사정을 이야기한다.
제사는 브리지와 기관실에서 각각 지내는데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장음의 기적 소리를 울려 주는 게 시작한다는 신호이다.
제사의 형식은 우리나라 일반인들이 고사를 지내는 방식에 준해서 실행 하지만, 모두 자신의 뜻에 따르게 하므로, 종교를 가진 사람은 절을 하지 않고 옆에 서서, 자신의 믿음에게 안전운항을 비는 마음으로 행사에 참여하여 지켜보도록 권장하고 있다.
나도 절하는 행동은 하지 않고, 항상 우리들의 안전을 지켜주시는 분을 향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행사를 주관하면서, 오늘도 기적은 내가 울리어 행사 시작을 알렸다.
이렇듯 적도제는 장기 항해로 생길 수 있는 선원들 간의 긴장감이나 작업으로 인한 스트레스로부터 벗어나게 하려는 의도로 하루 일과를 휴무로 하여 일도 접어주며 행하는 행사이지만, 결코 종교적인 행사는 아니다.
회사도 그런 의도를 최대로 살려, 이 행사에 쓰이는 돼지 머리나 과일을 준비할 수 있는 경비로 전선원의 반일 분 부식비를 합산한 액수의 금액을 사용할 수 있게 허가해주고 있다.
드디어 절하는 사람들의 제사가 전부 끝났다. 또 그 방식에 통달한 사람들의 주선으로 갈매기나 물속 생물들을 위한 고수레를 하고 나니 이제는 참가자들의 음복 순서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껏 열심히 쳐다보고 절도 하면서, 웃는 얼굴이니 좋다는 둥 화제의 대상을 삼던 돼지머리가 해체될 순간이 온 것이다.
오늘은 조리장을 제치며 갑판수가 나서더니 자신이 그 작업을 하겠다며 식칼을 잡는다. 해체하는 솜씨가 아마도 동네에서 한두 번 이상은 본 재주로 제법 먹음직스럽게 고기를 썰어 내고 있다.
맨 나중 돼지 골을 꺼낼 때쯤, 서로 먹겠다고 약간의 승강이가 있었던 것이 그간 보아 오던 적도제의 마지막 파장 무렵의 모습이 었는데, 오늘은 아무도 골을 찾는 사람이 없고 갑판 수도 파내지 않고 밀어둔다.
-기껏 돼지 골을 파 먹어 봐야 돼지 머리밖에 더 되겠어?
지난 항차 제사 중 서로 먹겠다고 나서는 몇 사람을 두고 우스개로 발언했던 내 생각에 모두가 동의를 해주는지 이번에는 돼지 골을 찾는 사람이 없고, 음식을 장만하는 사람도 그것을 챙겨 주지 않고 있다.
그래도 동물들 중에서 돼지는 똑똑한 축에 든다는 데...,
아무리 그렇긴 해도 돼지는 돼지라는 내 생각이 모두한테 먹혀들었는가? 웃음이 절로 지어진다.
저녁 무렵.
다음 항차의 기항지들이 호주의 뉴캐슬에서 선적하고 광양항에서 양하 하는 걸로 결정이 되었다는 통보가 본사 영업부로부터 왔다.
지금도 뉴캐슬에서 짐 싣고 포항으로 가는 중이지만, 다음 항차도 다시 뉴캐슬/광양을 기항한다는 차항 결정 통보는 계절적으로도 동승하려는 마음을 굳히는 신청자가 생기는데 일조를 더하고 있다.
현재 포철이나 한전의 화물을 운반하고 있는 광탄선이 기항하는 곳으로는 뉴캐슬 항이 세계 삼대 미항의 하나라는 시드니도 옆에 두고 있어 가족 동승을 할 경우, 가장 가 볼 만한 곳으로 치부되고 있는 것과 아이들이 방학을 하는 계절이라 신청자를 늘어나게 하는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도 혼자 가족 동승을 신청하는 것보다는 한 두 사람이라도 같이 하는 가족이 있는 게 바람직하므로, 아내와의 동승 신청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우리 애들이야 다 컸으니 관계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이제부터 아이들은 방학을 하고, 아주머니들은 집안일에서 벗어나는 시간을 조금은 내어 볼 수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차 항차 기항 예정지인 뉴캐슬은 내가 호주라는 나라를 처음으로 기항했을 때 만났던 항구이고, 시드니를 기차로 두 시간 이내의 거리로 두고 있는 항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