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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Mar 16. 2016

나는 밥 먹을 자격이 없다

함께 승선했던 이의 불행을 만나고

몸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아침밥을 안 먹기로 작정하고 버티기를 시작한 게 어느새 이틀이 지났다. 이렇듯 단식한다는 것과 굶는다는 것과의 차이점에 관해 그런저런 이야기를 일항사와 나누다가 문득 오래 전인 70년대 초 나의 일항사 시절에 부산항을 출항한 날로부터 식사를 거르던-굶던-일로 동료들을 힘들게 했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나는 밥을 먹을 자격이 없다”며 부산을 떠나 사이공을 향하던 배 안에서 계속 식사하기를 거부하던 선배 일기사의 일화가 떠오른 것이다. 

당시 그 배는 선장님과 기관장님 모두가 그 일기사와 동기생이었던 배로서 나는 일항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육상에서 다른 일에 종사하다가 남보다 뒤늦게 배를 타러 나왔다던 일기사는 고향에 본처가 있었지만 부모가 강제로 시킨 혼사였기에 부부간의 정도 없이 왕래를 끊은 채 객지 생활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부산에서 객지 생활을 하던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재혼 아닌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으니 제법 오랜 시간을 본가와는 소식을 끊은 채로 애매모호한 생활로 지냈지만 본처는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에 살고 있었단다. 
 

우리  배가 부산항에 기항하여 사이공행 화물의 선적작업을 하던 중, 정박 당직이라 배를 지키고 있든 일기사에게 아이가 심하게 아프다는 연락이 집으로부터 급하게 왔다. 


연락을 받자마자 즉시 집에 가려고 서둘러 나서던 일기사를 마침 현문(배의 출입구 사다리가 있는 곳) 사다리로 배에 올라오던 본선의 하역 인부 조장과 맞닥뜨리게 되었는데, 빗겨서면서 흘낏 보니 고향 친지였던 모양이다. 


바쁘기도 하지만 알은 채하기도 민망했을 일기사가 모른 체하며 바쁘게 지나쳐 내려 가버리니 긴가민가하면서도 일기사를 괘씸하니 여기게 된 그 사람이 본선 선원들에게 물어서 확인한 후 일기사의 본가에 연락을 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시부모를 모시고 있던 본부인이 부산으로 찾아왔단다.    

 

옛 사이공

이렇듯 괴로운 가정 사정으로 인해 심적 안정이 깨어진 일기사는 출항하는 날 도망치듯 배로 돌아와 떠나게 되었고 출항 후 하루가 지나면서부터, 자신은 밥을 먹어서는 안 되는 죄인이라며 적극적으로 식사시간을 회피하기 시작했다. 


처음 하루는 그냥 지나쳤지만 식사를 하지 않는 상태가 계속되면서 사이공 도착 전에 사고가 생기는 게 아닐까 우려되는 주위 사람들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러 가지로 회유하며 식사를 하라고 권유했지만 말을 안 듣고 피하기만 하였다.  
 
그렇게 식사를 계속 안 하면 차항인 사이공에 가서는 귀국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고 기관실에 숨어있는 그를 찾아내 이야기하니 제발 그리 하지는 말아 달라며 밥을 먹겠다고 했다.   

억지로 끌려 나온 식탁에서 밥을 물에 말아 끼적거렸지만, 어느새 숟가락을 놓은 후 눈치를 살피다가 슬며시 자리를 벗어나 도로 기관실 구석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곤 하였다. 


일기사로 인해 고심하는 선, 기장님의 모습을 옆에서 보기가 민망할 지경이었지만, 보통의 일이 아닌 정신병으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고, 더욱이 사이공을 떠난 복항 역시 무더운 기후의 인도네시아에 들려 원목을 선적하려는 어려운 사정임을 감안하여 할 수없이 사이공에 기항했을 때에 하선시켜, 귀국하도록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일항사로서 그런 결정에 참여를 했고, 꼬불꼬불한 메콩 강을 타고 입항한 사이공에서 3항사를 동행시켜 하선 조치되어 대리점원을 따라 배를 내려가는 그를 안쓰럽게 바라보는 도리밖에 없었다. 

우리는 일기사를 하선시키고 난 후 시원섭섭한 마음 되어, 다음 목적지인 인도네시아에 들려 원목을 싣고 부산으로 귀항할 때까지 그의 귀국한 후의 뒤 소식을 궁금해하며 전보 문의를 수차례 하였건만, 회사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어 그냥 무사히 도착했겠지 하는 무심함을 가지면서도 어딘가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다시 부산항으로 향하고 있었다. 


부산 외항에서 도착 즉시 검역 수속을 받을 수 있도록, 회사와 연락하여 저녁 근무시간 내의 도착하면 된다는 약속에 맞추기 위해 최대속력으로 달리느라 신경을 썼고 아슬아슬하지만 도착을 그렇게 할 수 있었다.  

그런 입항 수속 중에 제일 먼저 회사 직원으로부터, 일기사가 본선에서 하선하여 사이공 공항 호텔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세상을 버렸다는 말에 모두는 한동안 멍해 있었다. 


그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일들은 유념해서 챙기지도 않고, 입항 수속이 전부 끝난 것으로 치부하며 당직자를 제외한 모두는 집에 온 기쁨보다는 좀 음울한 기분을 가지며 상륙을 했다. 


나는 그날 밤 처가 집을 방문하여 장인어른의 간암으로 인해 새까맣게 타 들어간 얼굴을 뵙고 인사를 드렸으며, 병문안 차 내려와 있던 아내와 아직 엄마의 품 안에 안기어 있던 한 살배기 큰 애도 만날 수 있었다.  

다음날 아침 배로 들어가기 전 회사에 들리니 빨리 배로 귀선을 하란다. 


엊저녁 우리 배가 검역받지 않은 상태에서 선원들이 상륙했기 때문에 전 선원에게 만 하루 동안 상륙 금지 조처를 검역소로부터 명령받았고, 선장은 검역소에 출두하여 시말서를 제출하는 해프닝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전 날 입항 시 받은 수속은 세관 수속 만이었지만 회사 직원도 우리도 일기사의 충격적인 죽음의 소식을 전하고, 전해 들으며, 흥분된 상태여서 검역관이 승선하지 않았는데도 누구도 자세히 따지지 않고 넘어간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날 밤 상륙을 할 수 있었기에 처갓집에 들렸고, 생전의 장인어른의 마지막 모습도 뵈오며 인사드릴 수 있었으니 개인적으론 행운 아닌 행운을 가지게 된 셈인데, 

다음날 우리가 상륙 금지로 배에 묶여 있는 동안 장인어른께서 임종을 맞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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