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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Dec 20. 2019

뜻밖의 진급

1969년의 어느 날



시꺼먼 구름이 스멀스멀 모여들더니 어느새 후드득거리며 장대 같은 비를 흩날려 방금까지 무더위에 지쳐가던 싱가포르 풍경 속에다 하늘로부터 바다와 땅으로 힘차게 시원함을 뿌려주고 있다.


열대지방의 현지인들에게 뜨거운 무더위를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는 싱가포르의 명물이요 매력의 하나라고 일컬어지는 시원한 스콜이 때맞춰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을 그냥 무시하고 지워 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그렇듯이 시원한 빗줄기가 저 쪽에서부터 뿌옇게 다가오면서 항내 정박지에 머물고 있는 배들에게 다소곳이 씻김에 응하라고 손짓이라도 하는 듯싶다.


애달프고 급작스러운 사고를 당하면서, 팔 벌린 마스트 야드 암에다 조심스레 회사의 사기를 반기(조기)로 게양해주고 있는 묵호호의 브리지 기류 줄 위로도 씻김의 빗줄기가 다가오고 있다. 어쩔 수없이 모두가 조용히 받아들인 그 슬픔을 따라 주렴인가? 비에 흠뻑 젖어들며 깃발은 후줄근하니 늘어져가고 있다.


두 시간쯤 전 응급 들것에 실린 본선 일항사를 급하게 인계받아 육상 앰뷸런스로 이송하였던 긴급구호 보트를 통해 그들이 통선장에 도착할 무렵 이미 사고 환자가 사망했다는, 공식적인 사망선고 시간을 연락받은 후부터 묵호호는 영안실에 입실하게 된 故 K일항사와 함께 오늘의 모든 일정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이승을 마지막으로 떠나는 입관 예식이 진행 중인 그 시간에 즈음하여 회사 기를 반기 게양으로 하고, 장성 1발의 긴 기적을 취명 해주면서 함께 했던 동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은 예의로 동참하기로 한 것이다.


사실 그런 행사가 정식의 장례예식에 규정된 일은 아니었지만, 집 떠난 바다 위에서 온 몸 다 바쳐 회사를 위해 일하다가 사고로 순직한 선원에게, 남아있는 동료들이 그 슬픔을 추스르며 함께하는 조사의 마음이라, 결코 사규를 벗어난 일은 아닐 것이라 믿어 선택한 행동이었다.


열흘쯤 전이었다. 나는 먼저 탔던 배를 하선하면서 받았던 연가기간을 다 마치지 못한 채, 새로이 발령받은 선박에 승선하려고 집을 나섰다. 그렇게 찾아 떠났던 강원도 묵호 항이었고 마침 배선받은 배의 이름도 그 항구 이름과 같은 묵호 호였다.


본선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 해사위원회가 독일 U-Boat에 의한 미국 상선의 손실을 메우기 위해 대량으로 건조했다는 3,000톤 급의 전시 표준선(戰時標準船)인 CIMAVI형 선박이다.


국내에는 운항사항에 몇 가지의 조건을 붙인 원조물자로써 도입되어, 국영회사인 <대한해운공사>에서 운항 중인 선박 중 한 척으로 이들은 모두 국내 항구 이름을 자신들의 이름으로 지어 받고 있었다.


앞으로 외국 선주에게 12개월이란 장시간 기간 용선에 나설 계약을 맺어 그 용선주에게 인도 예정지인 싱가포르에 기항할 작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용선 인도전까지의 보름여 남은 기간을 묵호/기륭 간의 포대 시멘트를 싣고 한 항차를 하려는 예정으로 묵호항에 기항 중인 바쁜 본선을 찾아 나선 셈이라, 현지 대리점에 들러 승선 수속을 끝내자마자 즉시 부두에 계류하여 작업 중인 본선을 찾아 나섰다.


승선 예정 기간인 최소한 일 년 동안은 집에 갈 수 없고, 가족과 떨어진다는 서러운 아쉬움을 속으로 삼켜가면서 첫 대면하게 된 묵호호는 어느덧 저물어 가는 하루 속에 한창 포대 시멘트를 선적하는 작업으로 분주해 있었다.


배에 올랐다. 마침 현문에 나와있던 K일항사부터 만나게 되어 인사를 하게 되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덥수룩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인상의 일등 항해사 K 씨와의 짧은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K일항사는 당직 타수를 불러 교대할 2 항사의 방으로 안내하게 해 주며, 교대 사항을 서로 확인한 후 정식으로 서류상 교대를 하라고 일러준다.


선장님은 마침 부재중이어서 나중 귀선 한 후 인사드리기로 하면서, 전임 2 항사와 함께 선내 전반을 둘러보고 필요한 사항은 메모해 가며 교대 준비를 시작하였다.


저녁때가 되었다. 교대 서류에 서명하는 정식의 교대는 다음날 아침에 하기로 한 후, 앞으로 같이 생활하게 될 3 항사와 기관부 사관들 그리고 갑판장을 비롯한 선원들과 두루 인사를 나누는 가운데 손님방을 임시의 하룻밤 잠자리로 배정받았다.


묵호호와의 첫 대면을 그렇게 바쁘게 보내며 첫날밤을 지낸 후, 다음날 아침을 맞이했다. 전임자와 함께 선장님에게 교대 보고를 드리며 본격적으로 본선 선원으로 서의 생활에 들어선 것이다.


선내 생활 첫날 이건만 선내에 회자하고 있던 굴곡 심한 삶을 살아온 K일항사의 실패가 주류를 이룬 듯한 이야기가 호기심 곁들인 남의 일이기 때문이었을까? 승선 하루 만이지만 어느새 대충은 알아채 버린 기분이 들고 있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해군 장교로 임관하여 대위 때까지는 잘 나갔으나 함정의 포술장으로 근무 중일 때 책임져야 할 부하 사병의 중대한 과실사고로 인해 제대를 당할 뻔했지만, 옷을 벗는 대신 병과를 바꾸어 경리장교로 전과하며 근무를 계속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새 마음으로 시작한 경리장교 로서의 일도, 몇 년 해내지 못하였으니 이번에는 직속 부하가 일으킨 경리 부정사고로 인해 부득이 제대를 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마침 취득하고 있었던 일등 항해사 해기면허가 있어서 본선의 일항사로 승선하게 되었다는 소문이었다.


군에서 두 번씩이나 잘못에 연유되어 결국 옷을 벗게 된 사연은 딱해 보였으나, 인품으로 서의 일항사의 첫인상은 너무나 사람 좋은 호인으로 느껴졌다. 어찌 보면 사람들이 쉽게 무시하고 얕잡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 좋은 인상이 - 그냥 묻어나는 무골호인의 모습이 - 그를 그렇듯이 힘든 삶을 살게 한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마저 강하게 받았다.


다음날 아침나절. 전임 이항사와 함께 서류상 인계인수서를 작성하여 서로 서명한 후 K일항사에게 제출 보고한 후, 하선하는 전임자를 갱 웨이 앞에서 배웅해주면서 이제 본선의 당직근무에 정식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동안에 예정한 양의 포대 시멘트 선적을 모두 끝내며 대만의 기륭항을 향해 묵호항을 떠나야 할 순간이 왔다. 앞으로 일 년간은 다시금 가족들과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과 새롭게 찾아 나서야 하는 항구 들과의 새로운 만남에 호기심마저 품으며 묵호를 떠났다.


항해에 나선 사흘이 지난 오후에 도착한 기륭항에서 본선은 검역묘지에 투묘 즉시 검역관이 승선하여 입항수속을 해주고 이어서 도선사도 바로 승선하여 그대로 부두에 접안시켜주는 초고속의 빠른 입항 수속으로 대해 주었다.


이렇게 빠르게 진행되는 상황으로 미루어 본사에선 용선 시작 예정 기일 전에 싱가포르에 도착시켜 용선주에게 넘겨줄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원하는 모양이다.


옅은 안개가 낀 기륭항에서 야간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뿌연 박무와 뒤섞여 날리는 시멘트의 마른 가루 냄새가 콧속을 매캐하게 만들어 절로 공기의 흡입을 조심스레 숨 쉬게 한다. 갑판 위에서 작업의 진행을 살피며 화물 양하 당직에 임하고 있는 데 일항사가 호출한다는 연락이 왔다.


-일 항사님, 부르셨습니까?

-어~ 이항사 나 상륙했다가 들어올게 수고 좀 해라.

자신을 찾아와 호출한 용무에 대해 물어보기도 전에 외출 준비를 하고 있던 일항사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예, 상륙 나가시게요?

-응, 뭐 좀 살 것도 있고 해서...

-예, 그럼 잘 다녀오십시오.

일단은 당직에 대한 사항은 묵시적으로 양지한 상태이니, 그냥 대화를 끝내고 방을 나서려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말을 걸었다. 


-상륙하면 재미있는 곳도 있다던 데요.

지나가는 말처럼 이야기를 흘린 것이다.


-그래 그런 곳도 한번 가 보려고...

일항사 역시 별일 아니란 듯 대답을 하는데.


-일 항사님, 그런 곳엔 가실 생각하지 마세요.

-몸도 돈도 마음도 다 버리는 별로 좋은 곳이 아니랍니다.


그렇듯이 갑자기 못하게 말리고 나선 일은 <밤거리 여자를 만나는 일>이었다. 별로 친할 시간도 없었던 K일항사였지만, 결국 현문 앞까지 쫓아가며 말리던 농담조로 주고받던 이야기 끝이, 왜 그렇게 정색을 하면서까지 이어지게 되었는지는, 나 스스로 생각해도 야릇한 심정이 들었다. 

-아~아! 알았어! 

조금은 귀찮고 또 의아한 마음까지 드는 듯, K일항사는 손사래를 처가면서 잘라내 듯 대꾸해주면서 갱웨이를 떠나 상륙 길에 나섰다.


밤안개가 부드럽게 퍼져 있는 바깥세상인 기륭 시내를 향해 K일항사가 그렇게 배를 떠난 후, 양하 작업 상태를 둘러보기 위하여 나는 당직 현장인 갑판으로 다시 나섰다. 


한밤이 깊어 갈 무렵 상륙했던 선원들이 하나둘씩 귀선 하고 있다.

그중에는 얼굴에 불그스레한 주기마저 살짝 띄우고 있는 K일항사의 모습도 끼어 있다.


-일 항사님! 바깥세상은 좋았습니까? 

어쩌면 상선 사관으로선 생애 첫 외국에서 상륙했던 K일항사를 향해 말을 걸었다.

-그래 좋더구먼, 그리고 말이야 난 자네가 찾지 말라던 곳은 안 갔어! 절대로 안 갔어이~ 허허허.


나보다 인생살이 10년은 선배가 되는 K일항사가 첫 외국 상륙을 다녀와서 하는 이야기이다.

-네에! 참 잘하셨습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준 K일항사에게 감사한 맘까지 품었다는 표정 지으며 격려의 대답을 해준다. 

내가 왜 그 일을 극구 말리려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댈 수 없었지만, 결혼과 관계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나는 당시 아직 신혼 초의 초보 신랑이었다.


하루가 또 그렇게 지났다.

날이 밝은 오전 중에 묵호항에서 싣고 온 포대 시멘트는 전량 다 무사히 양하 되었고 관련 서류도 모두 마무리되면서 출항이란 바쁜 일정으로 이어졌다.


이제 새롭게 장기 용선할 용선주에게 본선을 인계해 줄 싱가포르를 찾아가는 항해가 시작된 것인데 아직도 용선주에게 정식으로 인계가 된 항해는 아니지만, 용선의 인계인수를 원활히 하기 위해 그들의 지시도 본사의 지시와 함께 받아가며 항해를 계속하였다.


싱가포르 묘박지에는 나흘 뒤 오후에 도착하였다. 용선주로부터 내일 아침 9시에 서베이어가 승선하여 On hire survey를 실시할 예정이니 그 시간 전까지 본선에서는 해치 카버와 폰툰을 모두 열어 놓고 기다리도록 요청해왔다.


그 요청을 받은 오후 시간. 본선은 서베이어가 승선할 다음날 아침 시간 전에 일찍 기상하여 해치 폰툰과 해치 커버를 모두 열어 놓도록 하리라 작정하며, 오후는 그대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본선 선원들이 선창 오픈 작업을 시작할 무렵, 약속보다 이른 시간에 하얀 작업복을 입은 서베이어(검사관) 한 사람이 승선하였다.


현문 당직자로부터 서베이어가 본선에 승선했음을 보고 받은 일항사가 부리나케 점검 준비를 하며 서베이어가 있는 2번 창 맨홀 앞으로 마중 나갔다.


갑판 부원들이 모두 앞쪽의 1번 해치 폰툰부터 열려고 선수 쪽으로 나가 작업을 하는 동안 서베이어는 2번 선창에 들어가 검사하자며 열려 있지 않은 깜깜한 2번 선창 내로 같이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빨리 2번 선창 해치 폰툰을 열어주도록 갑판장에게 지시하며, K일항사는 서두르는 서베이어를 따라 2번 선창 맨홀 뚜껑을 열고 선창 안으로 사라졌다. 그때 K일항사가 좀 전 작업화 뒤축을 꺾어 신은 상태로 갑판에 나섰던 모습이 어째서 나의 뇌리에 확 남았는지….


작업 중이던 선원들이 1번 선창의 해치 폰툰 오픈을 모두 끝내고 2번 창으로 옮겨 가려고 할 무렵, 아직 해치 폰툰이 열려 있지 않은 2번 선창으로 K일항사와 함께 들어갔던 서베이어가 하얗게 질린 안색으로 혼자 급하게 맨홀을 빠져나오며 뭐라고 소리쳐 부르는 모습이 브리지에 있는 나의 눈 안으로 들어왔다.


그에 따라 앞쪽에서 해치 폰툰 개방 작업을 지휘하고 있던 갑판장이 급하게 서베이어 쪽으로 달려오는 모습도 보인다. 


두 사람이 손짓 발짓해 가며 뭐라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그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이 어떤 사고가 발생한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부쩍 부추긴다.


잠시 후 갑판장이 2번창 맨홀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 서베이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그대로 본선을 떠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2번 선창 안에서 K일항사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다는 직감을 가지며 잠시 갑판장이 선창 내 상황을 살펴 올라오기를 기다린다.


한참이 지나간 듯도 하고 금방인 것도 같았던 시간이 지나며 2번 선창에서 급히 올라온 갑판장이 

-일항사가 트윈 데크에서 추락하여 로워 홀드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하고 소리친다.

-어딜 다친 겁니까? 지금 정신은 있어요?

-아직 잘 모르겠어요.

-그럼 얼른 해치 폰툰을 열어 일항사부터 병원에 갈 수 있게 준비해요.

갑판장에게 다음 일을 빨리 진행하도록 지시하며 나는 상황보고를 하려고 선장실을 찾았다.


-선장님, K일항사가 2번 선창 트윈 데크에서 로워 홀드로 추락하였답니다.

-일항사가? 그래 상태는 어떤 거야? 

-자세하게 알려진 것이 없어 지금 저도 곧 홀드로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그래 빨리 다녀오게 나.


나는 즉시 선장 방을 물러나와 내 방으로 가서 복장을 다듬고 카메라를 챙겨 들고 현장을 향했다.


지금 한창 해치 폰툰에 고리를 걸어 들어 올리려는 모습을 보며 2번 선창의 맨홀로 들어섰다. 그리고 고정 사다리의 스텝을 밟아 밑으로 내려가 조심스레 트윈 데크 바닥에 닿았다.


순간 아직은 컴컴한 어둠 속에서 평소와는 다른 비릿한 피비린내의 냄새가 가쁜 숨을 들이쉬는 콧속으로 훅 끼쳐온다. 

선창으로 내려서는 층계 스텝을 아직도 한 손으론 힘을 주어 꽉 붙잡은 채 어둠에 싸여 있는 주위를 둘러보는 시야에 방금 메인 데크 해치 폰툰이 걷히는 공간을 통해 들어선 빛줄기로 인해 선창 내부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층으로 된 선창이다. 위쪽 선창 바닥인 트윈덱크 바닥 중앙부에 개구부인 해치오픈닝이 있어 평소엔 해치 폰툰으로 덮어 두었다가 하부 선창에 선적이 있을 경우 열어 주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 그들 중 각각 선수미 쪽 개구부에 있는 폰툰 두 개는 걸이식 폰툰이라 로워 홀드 사용 시 다른 폰툰처럼 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그냥 세워서 고리를 걸어 기둥에 묶어주는 건데......


다른 폰툰들은 모두 닫혀 있는데 선수미 쪽의 걸이식 폰툰만은 덮여 있지 않고 세워져 기둥에 묶인 열어 놓은 상태로 있는 게 보인다. 


그렇게 들려 세워진 자리가 시꺼먼 허공으로 남아있다. 그것이 함정이 되어준 모양이다. 어둠 속의 트윈 데크에서 손전등으로 내벽을 살피다가 무심코 뒤로 물러서려던 일항사의 실족을 거들어 사고가 난 것이란 유추가 그냥 세워진다.


나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항사를 찾기 위해 계단을 잡고 있던 손을 가만히 놓고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아직도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 로워 홀드 아래로 눈길을 보냈다. 그곳으로 내려가야 하는 것이다.


가시지 않은 어둠 속에서 피비린내가 더욱 짙게 피어오르며 어슴푸레한 로워 홀드 바닥 위로 몸체 왼쪽을 아래로 하여 길게 엎드린 자세의 양팔을 벌린 일항사가 그림자 마냥 눈에 들어온다. 머리 있는 부근에서는 마치 구부러진 지팡이의 손잡이를 닮은 시커먼 그림자가 홀드 바닥에 짙게 드리워서 길게 뻗어 나가고 있다. 피가 흘러내린 자국이다.


뒤 따라 내려온 갑판장에게 얼른 해치 폰툰을 마저 걷어내고 들것을 준비하여 빨리 병원에 보낼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하면서 로워 홀드로 내려가는 수직계단에 몸을 실었다.


이미 사고 즉시 인명을 빼앗긴 사고라는 점을 누구도 의심할 수 없게 일항사의 얼굴은 많이 부어서 일그러진 모습이다. 피와 함께 뇌수도 조금 흘러나온 처참한 상태에 슬플 겨를도 없다. 


가지고 온 카메라를 들어 현장 사진을 찍는, 내 마음속에 마구 솟구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이 들끓는다. 이런 사진을 찍으려고 이렇게 사진기를 준비한 게 결코 아니었는데… 

-일 항사님! 이런 사진 찍으려고 준비해 둔 필름이 아니었습니다. 

한편으론 또 다른 죄송함을 비는 후회의 마음도 끓어오른다.

-일 항사님 당신의 마지막 소원을 막아버린 제 참견 참으로 면목이 없습니다. 

그리도 엄중한 자리에서 왜 그런 생각이 먼저 떠 올랐는지… 나도 모르겠다.


바쁘게 진행된 사고 뒤처리 일환으로 회사와 연락을 취하던 선장님이 방금 전달된 회사의 긴급한 진급 인사 사명을 전해준다. 2등 항해사로 승선한 나를 일등 항해사로 근무하라는 진급인사 사명이었다.

통상적인 상황에서 그런 진급 소식을 들었다면 그 기쁨이 크겠지만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서러움이 불끈하니 솟구치며 순간 알 수 없는 죄책감 같은 슬픔이 찾아든다. 


이제 K일항사를 위한 정성 들인 장성 일발의 긴 기적을 울려주려는 시간이 되었다. 브리지를 향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브리지에 도착하여 잠시 숨 고르기를 한 후, 짧았던 K일항사와의 인연을 끝맺음이라도 하려는 듯 기적 버튼을 지그시 눌러 준다. ‘부~우 웅’ 하는 서럽고 목이 쉰 듯한 구슬픈 음색의 기적소리가 긴 여운을 간직하며 비 내리는 싱가포르 항내로 조용히 퍼져 나간다.


엄지 손가락으로 굳게 기적 버튼을 누르고 있는 나의 뇌리에는 일등항해사 K를 처음 만난 날부터 겨우 열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지난 며칠 간의 기억들이 두서없는 바쁜 주마등 되어 빙글빙글 돌아서 흘러들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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