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만의 생각으로 쌓아둔 계획이 무너지는 일
지난번 광양을 출항하면서 요청했던 연가 신청자 들에 대한 회사의 회신이 입항 일주일을 앞두고 연락이 왔다. 보통은 입항 사흘 전쯤에 오는 게 예사였으니 좀 빠르게 온 회신이다.
헌데 연가를 신청하지 않았던 한 사람이 그 명단에 들어있다. 사명 연가를 하도록 지시가 온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 듣는 당사자는 실망이 큰지 꽤나 당황한 표정이다. 회사가 너무 오래 승선하고 있다고 판단하여 본인의 연가 신청이 없음에 관계없이 내리도록 조치한 상황이므로 본선의 책임자인 나로서도 딱히 무어라고 거들어 말할 입장도 못 되는 형편이다.
그것은 선장이라는 직책이 예전 범선 시대나 아니 그 후인 20세기 초반까지도 가졌던 것과 같은 무소불위(無所不爲)의 권위는 슬그머니 사라졌고, 회사의 지시에 따른 시키는 일만 집행하는 현장 책임자로 탈바꿈되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현실 때문이기도 하다.
작년 이 맘 때 승선하여 이제 11개월째로 들어서지만, 가정 경제 여건을 고려하여 계속 승선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그 친구는 생각지도 않은 연가를 부여받고 보니 결코 달가운 마음일 수가 없어, 집안 형편 걱정으로 밤새 잠 한숨 못 잤다는 이야기를 아침 조별과업 때에 내비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본선에서 내려 달라고 신청하지 않은 사람을, 본선과는 아무런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끄집어 내리면, 마치 큰일이나 난 것 같이 항의하고 어떤 때는 회사의 결정에 반하여 그대로 계승시키는 따위의 파워도 가졌던 세월이 선장에게 있었던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습니까? 알았습니다. 하는 정도의 표현이나 하며 그냥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당사자의 밤새 잠을 못 잤다는 말을 들어도 그냥 못 들은 채 엉거주춤 넘길 수밖에 없는 형편이 조금은 약 오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도 신청하지 않았던 연가를 사명으로 부여받았던 기억이 있다.
벌써 10 년 가까이 지나간 날에 있었던 일로서 당시는 내 혼자의 지레짐작 때문에 아무런 항의를 하지 않고 그대로 회사 지시에 순응하여 연가에 응했던 것이다.
그랬던 이유가 혹시 우리 집안에 부모님 상을 당하는 것 같은, 내가 꼭 참여해야 하는, 힘든 일이 생겼기에 연가 부여를 주며 내리라고 하는구나! 하는 불길한 지레짐작을 하였기에, 차마 확인도 하지 못하고 일단은 하선 지시를 그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선원이란 직업이 가장 괴로울 때가 바로 그런 일들을 당할 때이다.
설사 부모님이나 직계가족의 상을 당하였다 해도 입항할 때까지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므로, 회사에서는 차라리 본인에게 직접 알려주지 않고 기다렸다가 입항수속을 하는 자리에서 알리게 되는데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인 것이다.
다행히도 당시의 내가 가졌던 그런 짐작은 빗나가서, 하선하였던 순간에 우리 집에는 그런 불길한 일은 생겨있지 않았다.
단지 회사가 일방적인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나를 하선시킨 케이스였지만, 교대하여 배를 떠나던 순간에서야 왜 내가 사명 연가에 아무런 토를 달지 않고 동의하였는지, 나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섭섭해진 심정을 가지고 때 늦은 항의 아닌 항의를 했던 당시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사족; 예전에는 일 년을 승선해야 연가를 부여받았던 세월이었고 그 이상도 본인이 원하면 계속해서 승선할 수도 있었지만, 현재는 6개월만 승선해도 연가를 부여받으며 그 이상의 승선기간 연장은 세계적으로 선원의 복지를 위한다는 이유로 금지하는걸 원칙으로 삼는 연가제도가 운용되는 실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