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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청객

청하지도 않지만, 만나기도 꺼려지는

by 전희태
bri2000072600(3880)1.jpg 대만 동쪽에 둥근 흰공 모양의 구름 덩어리인 태풍 BOLAVEN의 초기 모습으로 아직까지 눈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인터넷기상청 자료에서 퍼옴)


출항하고 몇 시간이 지나서 받아 본 기상 팩스에 원하지 않는 작은 불청객 하나가 나타나 있다. 우리가 내려가야 할 길을 막아서는 모습의 열대성 저기압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아직은 크게 자라지 못한, 태풍으로서의 면모를 내세우며 달려들 정도의 세찬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얼마 지나면, 큰 태풍이 될 수도 있는 그런 폭풍의 덩어리로서 이미 이름을 부여받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항로 선택을 추천해주는 KS WEATHER에서는, 동진에서 북진으로 서서히 바뀌어 가다가 다시 북동진 하면서 올라갈 예정이니 본선은 그 진행방향의 왼쪽에서 안전하게 항행하도록 오른쪽으로 코스를 좀 더 틀어서 가도록 지시되어 온 것이며 괌의 미 해군도 같은 의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항로 추천사인 오션루트와 일본의 기상청 예상은 오키나와로부터 중국의 상하이까지의 동지나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서 가는 것으로 예상하니 바로 우리가 내려가려는 침로에 그대로 X자로 가로질러 가는 모양을 예상하고 있다.


아무래도 좀 더 철저히 하여 놓고 항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 회사에도 알리고 KS WEATHER에도 정오 위치를 통보하며 또 다른 추천이 있다면 빠르게 연락해 달라고 했더니 침로를 일본 규슈의 끝 단을 바라고 달리도록 한다. 오션루트와 일본 기상청의 예상에 동조하는 조치로 보인다.


즉시 침로를 206도에서 110도로 변경하여 TOKARA STRAIGHT로 향하도록 조처하고 회사에도 그런 사실을 팩스로 알려주었다.


일본 구주의 서단에 접근한 OSUMI STRAIT는 하늘도 바다도 점점 더 거칠어지는데 특히 허옇게 상처를 받은 바다는 자신의 위를 달리고 있는 배를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지 작은 진동으로부터 점점 큰 움직임으로 바꾸어가며 흔들어 대기 시작한다.


그에 장단이나 맞추듯이 하늘도 시꺼멓게 변해가면서 더욱 세찬 빗줄기를 뿌려준다. 선체를 두드리고 지나는 빗소리가 귓속 가득 메워 들며 음울한 소름을 돋게 만든다.


어쩔 수 없이 늘어나게 된 항해 할 거리를 조금이라도 줄여 보겠다고, 태풍이 지나칠 법한 쪽으로 가깝게 코스를 잡을 수도 없어 SE인 135도의 침로를 설정해 달리고 있다.


그 침로 역시 풍파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어 앞바람에 앞 파도로 달려드는 기세에 멈칫거리다 보니 속력 역시 제대로 내지 못해 7~8 노트를 겨우 유지하고 있다.


북반부에서 만나는 태풍을 피항할 때는 가능한 한 태풍 진로의 왼쪽을 항해해서 피하는 것이 원론적인 원칙이다. BOLAVEN이 아직 크기 전인 초기에는 그런 정석을 염두에 둔 KS WEATHER의 추천도 있었지만, 곧 예상과는 좀 다른 길로 움직일 것 같은 새로운 추측이 우세해져 왼쪽만을 고집하다가는 태풍의 진로를 가로지르는 경우도 생각하게 된 셈이다.


태풍의 앞을 가로질러가는 그런 위험한 모험은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곤 안 하는 게 좋은 것, 아마미오시마 부근에 머무르고 있는 태풍을 확인하며 침로를 왼쪽 대각도로 꺾어서 일본 규슈의 육지 쪽에 바짝 붙어가기로 했던 것이다.


태풍 진행방향의 어느 정도 오른쪽이긴 하지만 그대로 통과하는 것이 가장 최상의 방법이라 믿어졌고, KS WEATHER의 재 추천 항로도 그랬다.


어쨌거나 현장에서의 최종 결정과 모든 책임은 나에게 달려있는 것이니 최선의 결과를 얻기 위해 녀석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며 달리는 내 마음은 항시 불안과 초조가 겹쳐진 상태도 함께 갈무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동료 선원)에게 그런 쪼그라든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혼자서 하는 속앓이로, 수시로 브리지에 올라가 기상 관련 전보문을 훑어보고 현재의 상황이 최선의 길인가를 계속 지켜봄을 그나마 편한 일로 여기기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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