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히 수로를 빠져나오고

짐을 잔뜩 싣고 다시 북태평양으로 나서다

by 전희태


황천-01.JPG 파도가 쳤다하면 선수루에는 늘 덮어씌우려고 달려들곤 한다


흰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인양 바다와 섬 모두를 같이 가려주고 있던 안개가 슬그머니 들쳐지면서 둘 사이의 경계를 뿌옇지만 보일 수 있도록 눈 안으로 밀어 넣어 준다.

물개의 서식지로도 유명한 빅토리아 항 남쪽 Race Rock 돌섬의 등대를 오른쪽 정횡으로 바짝 당겨 뒤로 보내기 직전의 모습이 레이더 화면이 아닌 실물로도 보인 것이다. 선수를 오른쪽으로 돌려 새침로로 수정해준다.


여기서부터 우리 배의 항로 관할은 Vancouver Traffic (캐나다)에서 양국의 국경선을 넘나들며 지나야 하는 Juan De Fuca의 Out bound 항로를 빠져나갈 때까지 미국의 Seattle Traffic에서 인수하여 관할한다.


이제 한나절 열심히 달려서 항로 입구인 J-Buoy에 도착하여 태평양으로 들어서게 되면, 이번에는 캐나다의 Tofino Traffic에서 밴쿠버 섬의 태평양 쪽 그림자에서 벗어날 때까지 맡아주는 통항 관할 체제가 가동되고 있는 것이다.

태평양의 검푸른 바다와 이어진 항로상에서 이름 그대로 태평하게 보여주는 물결 하나 만들어 주지 않은 매끈한 속살을 누비며 J부표가 있는 입구를 향해 열심히 달리고 있음을 응원이라도 해주듯이 안개도 조금씩 옅어져 가며 시정을 점점 더 넓혀주고 있다.


더도 덜도 말고 이 정도의 태평한 바다를 이번 항차 우리가 가려는 곳-대한민국-까지 계속 이어 주었으면 하는 꿈같은 바람을 가져 본다.

어제저녁 한밤중에 출항한다던 예정을 가질 때부터 이런 날씨가 항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간절한 바람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아주기라도 하는 듯, 원 하던 대로의 잔잔한 해면이 펼쳐지니 이번 항해는 시작부터 잘 풀려 주려나 느낌부터 좋다고 우기고 싶다.


밤새워 달려 나온 로버트 뱅크와 빅토리아 간의 항해에 잠을 자지 않고 버티어 온 때문에 뒷머리가 당기며 눈도 절로 감기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보고 할 일이 있으면 즉시 보고하도록 지시해 준 후에 방으로 내려왔다.


창문의 커튼도 닫지 않고 환한 햇살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 채로 잠깐 침대에 누웠는데도 피곤은 어느새 잠을 불러왔고, 'J’ buoy 통과를 10 마일 정도 남겼다는 연락을 받으며 눈이 떠졌을 때는 이미 점심을 들어야 할 시간도 한참 지나고 있다.

브리지에 올라가 미주대륙을 떠나는 마지막 항로의 점검을 하며 Toffino Traffic 과의 랑데부 신청을 해주며 새로운 침로에 배를 돌려서 맡겨 준다.


침로는 별로 많이 조정하지 않은 수치이지만, 밴쿠버 섬 남쪽 끝단을 벗어나며 301도로 북서 진에 보침 시키려 하니, 통상적으로 내해에서 와는 다른 너울이 나타나더니 알래스카만의 동남쪽을 향해 나선 배의 옆구리를 쓰다듬으려 한다. 그렇게 너울은 약간 흘러들지만, 파도는 새롭게 일지 않고 있는 좋은 날씨이다.

배가 달리는 속도는 8노트에서 7노트대로 떨어진다. 파이로트 차트를 꺼내 놓고 해류의 흐름을 살피니 우리의 침로와는 약간의 마찰을 가진 주해류의 흐름이 그려져 있다.


어서 알래스카만의 중앙부에 들어가서 서진하는 해류와 함께 하는 길 밖에 지금 떨어진 속력을 만회할 방법은 없어 보인다.

헌데 그곳으로 저기압이 북동 진으로 움직여 올라오려고 하고 있어 유심히 살피며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나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짐을 잔뜩 실어 건현(Free board)이 10 미터 정도로 낮아진 상태이라 갑판 상으로 물이 수시로 올라올 수 있기에, 좌현 선수루 밑에 설치되어 있는 Life-raft가 퍼 올려진 해수의 범람 때문에 해체되어 유실될 경우를 대비하여 아예 있던 자리에서 떼어내어 선수 창고에 임시 보관키로 한다.


Life-raft의 쓰이는 용도로서야 그렇게 창고에 수납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냥 놔두었다가 날씨가 심술을 부릴 경우 유실될 확률이 아주 큰 시즌이다. 그리 되면 회사의 경비가 그만큼 늘어나게 되니 챙기지 않을 수 없다. 안전의 관점에서 볼 때 결코 남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은 방법으로 항해 중에는 절대로 실내 구역에 수납시키면 안 되는 물건이기에 잠깐 치워두는 작업을 하고도 그렇게 작업을 했다는 공식적인 기록(항해일지에 기록하는 일)도 남길 수 없는 일이다.


작업을 위해 사람들이 파도를 제일 먼저 받는 선수 앞쪽으로 나가야 하는데, 위험하지 않게 또 바닷물도 뒤집어쓰지 않도록 파도를 덜 받을 수 있게 선수를 왼쪽으로 돌려 큰 너울이 비껴가게 해주었다.


앞에 나간 김에 선수 창고 쪽으로 물이 스며드는 곳이 없는가 확인하라고 책임자로 일항사도 같이 내보냈다.

현장과 워키토키로 이야기를 하여, 20여분 정도 걸릴 작업이 완전히 끝나게 되면 즉시 연락을 주고 오른쪽으로 들어오라고 지시한다.

얼마 후, 작업이 무사히 끝났다는 보고와 함께 작업자들이 거주구를 향해 오른쪽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타를 다시 오른쪽으로 돌려서 원래의 코스로 들어서게 하려고 있는 이항사에게 잠깐 조타를 보류시키도록 지시하며 이런 작업을 할 때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는 주의사항 하나를 이야기해준다.


-전에 다른 배에서 황천을 만나, 선수루에 오늘 같이 할 일이 생겨 사람들을 내보내고 작업을 한 적이 있었지.

-..........

이항사가 말없이 귀를 기울인다.



-지금 같이 선수를 돌려서 작업을 안전하게 하도록 협조해 줬는데 작업을 끝내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일이 생겼어, 사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었지.


-경험이 적은 3 항사가 사람들이 선수루에서 모두 내려오기도 전에 배를 원래대로 돌려주려고 서두른 거지.

-배의 선수가 돌아가던 중, 갑자기 선수루로 밀어닥친 큰 너울성 파도가 선수루를 덮어 씌워버렸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피하려던 갑판수가 윈드라스의 구석으로 처박히며 밀려든 파도에 강타 당해 갈비뼈가 부러지며 그 날카로운 끝단에 폐가 찔리는 큰 사고를 당한 거지.


-즉시 USCG에 구조요청을 해서 급하게 헬리콥터로 공수한 적이 있었지.

-원 침로에 찾아드는 것만 바쁘게 여기어 일찍 배를 돌리려 한 게 화근이 된 거지.


-그러므로 이런 작업을 도울 때는, 모든 사람이 무사히 선수루를 벗어날 때까지 침로를 유지해 주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야.

-선수루에는 황천 중 시행해야 할 일들이 종종 생기는데, 이때 제일주의할 사항이 바로 그런 점 임을 명심해두게나.


-나는 헬리콥터까지 불러들이는 등, 여러 가지의 힘들었던 부대 작업을 시행하는 비싼 수업료를 내면서 어렵게 배운 셈이지만, 자네는 이야기로만 쉽게 큰 일을 배운 거라네. 그렇다고 쉽게 잊지는 말 게나.


-예, 잘 알았습니다.

자신의 경험을 가르치는 사람의 조심스러운 마음을 이항사는 알아보았을까?


이항사의 대답 문구는 괜찮았지만, 어딘지 흡족치 않은 언사가 엿보여 한 말씀 더 하려 다가 그만두기로 한다.

잘못 전달되면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그냥 잔소리가 되어, 의미 없는 일이 될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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