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날짜를 다시 찾아 넣다.
새벽 두 시가 좀 못 된 시간에 날짜 변경선인 180 도 선을 서진으로 지나간다.
침로가 270도이니 북위 53도 48분선에서 지구 상 남북극을 통하도록 그어진 180도 날짜 변경선을 직각으로 통과한 것이다.
그렇게 날짜 변경선을 지나고 보니 토요일이 없어지고 그대로 일요일로 훌쩍 건너뛰며 12일이 된 것이다.
지난번 동진하면서 날짜변경선을 넘었을 때는, 같은 날짜의 날을 계속 사용했던 시간을, 이번에는 그때와 반대 방향으로 통과하며,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 받은 것이다.
저 아래 쿠릴열도 동쪽에서 북동쪽을 바라고 35-40 knots의 빠른 움직임으로 올라오고 있는 저기압의 동정에 초미의 관심사를 두고 조금이라도 그 저기압이 오는 길목으로부터 멀리 벗어나 보려고 열심히 달리고 있지만, 계속되는 앞바람으로 속력이 밤새 7-8 knots 선에 머무르며 더 이상 오르지 않아 조바심을 내게 한다.
저기압의 움직임이 예상도 대로 되면서 우리의 속력이 8 knots를 그나마 꾸준히 유지하면 230 마일 정도의 거리를 가지고 서로 비껴갈 수 있다는 계산을 해본다.
최소한 그 정도의 속력은 바라지만, 그래도 파도와 바람을 제법 크게 만날 각오도 하면서 만반의 상황에 대비하는 마음을 다진다.
어쨌거나 겨울철 북태평양의 악명 높은 저기압이다.
기상 예보로 나오는 기세가 너무나 등등하여, 제발 그 직접적인 영향권에는 들지 않기를 바라는 게, 기본적으로 내 마음에 깔려있는 생각이다.
일본과 미국에서 나오는 기상 예보를 모두 팩스로 수신하여 서로 비교되게끔 해도에 그려 넣어본다.
저기압의 위치가 될수록 우리가 있는 곳에서 지나온 뒤쪽으로, 또 위도는 남쪽으로 치우쳐 그려지기를 바라며, 작도한 결과에서 떨어져 있는 거리를 재어본다.
아직은 영향권이 아니지만 워낙 빠르게 달려오는 속력으로 오늘 오후부터는 영향받을 수 있어 보인다.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더 서쪽으로 가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건만, 이곳 바다에 불고 있는 서풍은 조용해지는가 싶다가도 다시 맹렬히 불어서 선수를 허옇게 치고 나오곤 한다.
차라리 이곳에 고기압이라도 큼직한 것이 생겨서 올라오는 저기압이 더 이상 북동진 못하고 밀려서 동쪽으로 갔으면 하는 심정은 없는 고기압 까지도 그려 넣고 싶은 마음을 키운다.
마음이야 그렇더라도, 집고 넘어야 할 사항이 있으니 폭풍을 만났을 때 그 바닷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 책임자로서의 당당한 용기와 결단이 희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당하기도 전에 겁부터 집어먹고 초조해하는 마음가짐은, 이런 환경을 헤쳐 나가는 데는 별로 큰 보탬이 안 되는 마이너스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어차피 당하며 거쳐 나가야 할 일이라면 그 상황에서 가장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강구하며 순발력 있게 파도와 바람에 영향을 가장 적게 받도록 조선해 나갈 수 있는 용기와 배짱을 키워야 하지 해보지도 않고 겁부터 집어먹고 우왕좌왕한다면 진짜로 위험할 수도 있는 것이다.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 번씩 엄습하듯 닥치는 황천에 대한 두려움이란 아무나 경험하는 그런 일이 결코 아니기에, 최선을 다하기로 작정하고 결과는 겸허하게 받아들이도록 마음을 다진다.
아침 여섯 시 30분. 동경 179도선을 통과하며 순간 속력을 9 knots로 보여주기는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영향권을 벗어난 것은 아니다.
일본 기상예보로는 오늘 낮 12시에 우리 배와 300마일 정도 떨어진 같은 경도에 위치한 상태에서,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가는데, 저기압은 북동진 하는 걸로 그려주고 있다.
북동진하는 저기압의 북쪽은 남쪽보다 영향이 적은 상태이긴 하지만, 저기압이 빠른 속력으로 접근하는 상태이므로 어느 정도 영향권에 들게 되면, 우리 배의 속력이 제대로 나지 못하여 자꾸 영향권에 끌려서 빠져들까 봐 걱정스러운 것이다.
그럴 경우 파도를 선수 좌우현 30도선에 두고 Heave to 하며 저기압이 멀리 가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때 높은 파도에 잘못 휩쓸려 선체에 무리한 응력이나 비틀림이 가지 않게 조선해야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새벽 6시의 저기압 위치를 확인하며 오후 6시 예상 위치를 보니 우리가 저기압의 정북으로 240 마일 정도 떨어져 있으며, 계속 가까워져 200 마일까지 가까워지다가 서로 빗겨 나며 우리는 계속 서쪽으로 저기압은 북동쪽으로 가면서 다시 멀어지는 걸로 예상이 되니 바람 마지는 오늘 밤이 고비가 될 것 같다.
밤이 지나고 아침 9시가 되면서 풍향이 왼쪽으로 20도 정도 돌아가고 바람도 잦아들기 시작하니 속력도 9 knots를 내주고 있다.
우선은 그만큼 만이라도 달려놓고 볼 일이라 열심히 달리지만 40 knots의 속력으로 찾아오는 저기압과의 속력 다툼은 아예 생각도 말아야 할 형편이다
그만큼 빨리 온다는 것은 또한 그만큼 빨리 간다는 것도 의미하니 빨리 온 것 이상 빠르게 우리 곁을 떠나가 주기를 기대하며, 그 저기압을 향해 불어 드는 바람의 바쁜 방향 전환과 세기를 가늠해본다.
풍력의 세기는 30-50 knots이며, 파고는 15피트에서 최고 25피트까지 예상된다는데 어차피 만나야 할 것이라면 30 knots 바람에 15피트의 파도로 만나는 게 그나마 바람직하지 최대 수치의 바람이나 파도는 사양하고 싶은 것이다.
1230시 바람이 다시 일기 시작하는데 방향이 왼쪽 약간 뒤쪽인 8시 방향에서 부는 것으로 나타난다. 센 바람은 아니지만 자근자근 백파를 일으켜 세우는 폼이 그냥 계속되면 롤링도 좀 줄 수 있을 것 같은 바람이다.
헌데 이 위치에서는 이런 방향의 바람이 아닐 터인데 아직 저기압으로 인한 바람은 아닌 것 같아 우선 달릴 수 있는 한 계속 달리도록 하고 있다.
오랜만에 집에 SSB 전화를 하여 아내와 통화를 한다.
바람을 만나 다른데 신경 쓸 정신이 없다가 혹시나 해서 전화 시도를 해 보라고 했더니 통신장이 우리 집 전화기 앞으로 아내를 끌어낸 후 연락을 해준 것이다.
출항 후 18일 정도에 입항할 것이라 이야기했었는데, 기상상황이 안 좋아서 늦어질 것이란 이야기를 하며 은근히 아내가 나를 위해 기도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쳐 보였다.
14시부터 바람이 뒤로 돌더니 어느새 저녁 식사 때쯤에는 본격적으로 다섯 시 방향에서 밀어주기 시작하여 겨우 10 knots에 턱걸이하던 속력을 10.3 knots라는 숫자로 올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