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출항 후의 모습
새벽에는 흐린 속에서 약하지만 눈발도 떨어뜨려 주더니 어느새 흐지부지 지나치면서 해가 나오는 개인 날이 된 상태로 출항 시간을 맞게 해준다.
해륙풍(주*1)도 아닌 바람이 11시 방향에서 세게 불어오기 시작하여, 부두에서 떨어지는 즉시 선수를 180도 돌려야 하는 입장인 우리 배에 달라붙어 있는 터그 보트들이 한쪽에서는 끌어당기고 다른 쪽에선 밀어야 하는 일을 한결 더 힘겹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제 있는 힘껏 다하는 터그보트가 만들어 주는 추진기의 회전으로 인해 기다랗고 하얀 자취로 물 위로 떠오르는 항적에 밀리어 본선은 열심히 회전에 빠져들고 있다.
갑판에 남겨진 석탄의 잔존물 위로 휘~잉 불어 닥치는 바람에 눈을 뜨기가 거북하게 석탄 가루가 날려지고 있다. 싸늘한 겨울의 기온이 귓가를 아프게 해주는데 문득 통신사 없이 출항하는 마음이 착잡하기만 하다.
그 직책이 없어지리라는 예상은 격변하는 해운계의 추세로 볼 때 10여 년 전에 이미 하고 있었지만, 막상 나의 앞에 그런 일이 발생하여 그 직책이 하던 일을 고스란히 도맡아 처리해야 하는 일로 닥치고 보니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가 찾아오는 모양이다.
도선사도 내려가고 내가 직접 조선하는 상태로 포항 외항을 빠져나와 남진하는 항해로 들어서서야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집으로 전화를 건다.
-여보세요?
-예, 저예요. 출항하셨어요?
-지금 출항해서 잘 달리고 있습니다.
-조금 늦게 출항한 거예요?
-예, 그렇긴 해도 많이 늦은 건 아니에요.
그리고도 한참을 더 이야기하다가 이제 서로는 끊을 때가 된 것을 공감하며 잠시 머뭇거리는데,
-집 걱정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
아내가 먼저 인사를 해 온다.
-알았어요. 당신도 건강하게 잘 있어요.
나도 마무리하는 대답을 해주면서
-이제 끊읍시다.
거들어 준다.
-예, 잘 다녀오세요.
공간을 달리 한 이별의 아쉬움이 잔잔히 허공 중으로 사라지며 마무리 지어 준다.
제대로 출항했는지 궁금해 있던 아내였지만, 반가운 목소리로 응대해주니 그래도 한결 편해진 마음으로 전화를 끝내었다.
저녁 식사를 한다. 지금까지는 다섯 사람이 앉았던 식탁이지만, 이제는 없어진 통신장의 자리가 비어 버려 네 사람(선장, 기관장, 일 항 사, 일기사)만의 식탁이다.
자리 하나가 비었다는 분위기로 이렇게 침울한 것 같아, 식사를 끝내자마자 얼른 일어나 통신실로 향했다. 컴퓨터 앞에 앉아 E-MAIL을 열어 회사로부터 온 공문이 있는가를 살폈다. 첫 통신사의 업무이다.
PANO WEEKLY 신문과 해사기술실에서 온 연락사항이 기다리고 있어 수신을 해서 처리한다. 첫 번째 통신 업무를 무사히 끝을 내고 한숨을 돌려본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
-파곡(波谷) 안의 운무(雲霧)-
빗방울 인양 떨어지는 듯하더니 어느 순간 펑펑 내리는 눈으로 바뀌어 온 바다 위를 희지만 검게 뵈는 세계로 만들어 주고 있다. 넘실대는 파곡의 사이사이엔 허옇게 운무로 채워주듯, 아니 김이 서리는 것 같은 풍경 속으로, 종잡을 수 없는 눈까지 합세하는 날씨가 계속되어 어리둥절하게 만들어 준다. 그래도 배는 별 탈 없이 몇 번의 침로 변경을 해가며 잘 달리고 있다.
일본 규슈 남단을 휘돌아 태평양으로 들어서는 길목이라 섬들 사이를 헤집고 지나야 하는 좁은 골목 같은 길이 곳곳에 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덕에 섬들의 모습도 가려지고 바다 표면 위에는 흰 꽃을 피우고 있는 파도가 유난히도 신경 쓰이게 하지만, 뒤쪽에서 오는 그 정도 파도에는 그래도 영향을 적게 받는 덩치는 되기에 묵살하며 달리고 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지금껏 이곳을 항해하면서 만났던 갈매기의 숫자가 많기는 했지만 이번만큼 무리를 진 갈매기가 하루 종일 계속해서 우리 배의 주위를 맴돌며 따라온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뒤바람이라 달리는 속력을 바람으로 알아내기는 어렵고 갑판에 나가면 별로 바람이 없는 듯싶지만 해면을 보면 허옇게이를 들어낸 아프리카의 맹수 같은 느낌의 파도가 계속 뒤로부터 치올리며 따라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공중을 날고 있는 갈매기들은 유유한 자태로 미동도 안 하고 하늘에 떠있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고개를 갸웃하면서 배와 함께 앞으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번 항차 특별히 맛있거나 냄새가 좋은 음식 쓰레기를 만들어 내서 바다에 버리며 달리는 것도 아닌데 이렇게 따라오는 모습이 많다. 갑판으로 나가니 Poop Deck에서는 날개를 접고 갑판에 앉아 있는 놈, 통풍 통 위에 날개를 접고 있는 녀석, 심지어는 핸드레일 위에 앉았다가, 접근하는 나를 보고는 힐끔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그대로 발을 살짝 차서 가볍게 허공 중으로 내닫더니 어느새 날개를 활짝 편 채로 여유 있게 날아 올라 배를 쫓아오는 일에 파묻히는 녀석도 있다.
녀석이 나의 접근을 피해 퉁기듯 몸을 들어 내려선 공중에서 바로 직하를 내려다보면 배의 프로펠러가 열심히 돌면서 허연 물거품에 와류를 일으키는 곳이다. 그런 일이 배를 앞으로 내보내는 힘을 쓰게 하는 곳이기에 항해 중에는 쉼 없이 계속되는 일이다. 그러니 급히 피하려 다 미끄러지기라도 해서 추락하면 그 와류에 휘 몰리면서 국물 한 방울도 없는 그런 무시무시한 곳일 수 있다.
녀석은 앉은 자세로 보면 별로 유선형도 아니며 몸집도 중 닭 이상의 볼륨을 가진 몸매인 데도, 사뿐히 공중으로 날아 올라 금세 유유자적하고 있으니 곁눈질로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에 절로 감탄을 일게 한다.
주*1 해륙풍 : 낮과 밤에 바람의 방향이 거의 반대가 되는 국지풍이다. 낮에는 해상에서 육지를 향하여 해풍이 불고, 밤에는 육지에서 해상을 향하여 육풍이 분다. 일반적으로 해풍이 육풍 보다 좀 더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