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
지난 며칠간 이곳에 도착 후 계속 주시하며 변화에 민감한 반응을 가지고 있었던 날씨였다.
그간 사흘 정도는 계속 비가 잠시 오다 말다 하던 걸로 마감하더니 이제는 쨍한 햇볕을 쏟아부어주어서 나의 우려했던 바를 말끔히 걷어 주는 듯하였으나 바람이 불 것을 걱정했던 예상은 아주 뒤엎지 못하여 항내에다가 하얀 바람꽃 - 백파 - 을 만들고 있다.
지금 우리 배가 접안하고 있는 구라강 부두와는 나란한 방향으로 불어오는 바람이 항내에다 파도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마치 여든 살이나 잡수신 노인네들의 얼굴 가득히 잡힌 주름살을 닮았든가? 아니라면 한국 옛 기와집의 예쁘게 주름 잡힌 기왓골 같은 무늬를 연신 배 옆의 수면에다 그려 주고 있다.
그 파도의 무리가 우리 배는 그렇게 옆으로 멋지게 지나쳤으나 저 우리 선수 쪽의 부두에 접안하여 그 파도와 직각으로 부딪치게 옆구리를 내놓은 배한테는 이따금 부서지는 파도를 올려 붙여줌이 마치 으르렁 거리는 호랑이 얼굴로 보인다.
남위 36도 동경 132도에서 998 hpa(헥토파스칼)의 저기압이 화요일(오늘)중에는 남쪽으로 서서히 움직일 것이라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기상방송은 전하고 있다. 그 저기압의 주위에는 시계방향으로 30/40노트의 바람이 일 것이며 파도도 높아 질 것이란다. 저기압의 남서 방향 4분의1 해역에는 파고가 높아질 것이고 남서 와 북서 반구에는 40/50노트의 바람이 예상 된다고 하니 우리가 출항하면 그 바람의 영향을 받아 제법 선체운동이 예상되기도 한다.
사실 오늘 아침에 출항 예정이 늦어지어 저녁 고조시로 되었는데, 이런 바람이 오는 걸 보면 차라리 빨리 떠났던 것이 좋았을 것을 하는 마음도 들지만, 저녁 고조시 출항은 화물의 싣는 양도 4,500톤 정도 늘어나니 운임 수익으로야 늦게 떠남이 바람직하다. 오후 들어서도 바람은 약해지기는 커녕 오히려 더 세어져, 결국 하역 작업의 중단상태로까지 초래하니 출항은 자동적으로 내일 아침의 7시15분 물때(고조시)로 넘어가 버린다.
저녁에는 항만청에서 직원이 나와서 돌풍이 세게 부니까 본선 라인을 더 잡아 주고 황천대비를 하라는 당부의 안내문을 전달해 준다. 두 척의 터그보트가 당직을 서며 도와줄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그 서류에 우리 갑판 당직 사관들의 서명을 받아 야간지시록과 함께 다음 사람에게 인계하도록 배려하고 방에 올라오니 한 번씩 불어 지나는 바람소리가 항내이건만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하지만 아까 낮에 이미 앞 뒤 쪽에 각각 두 개씩의 계류삭을 더 잡아 놓은 것이 그나마 있던 불안감을 덜어주고 있다. 생각해보면 밖의 외항에 투묘하고 있을 때 이런 일이 생길까봐 계속 걱정스런 마음을 가졌었는데 다행하게도 항내에 접안하고 난 후 이렇게 되니 그것만으로도 아주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