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알림판

by 전희태


250410-항해중 여명 032.jpg

낮이 무척 길어졌다. 하기야 하지를 한 달가량 남겨 놓은 시점이니, 계속 낮이 길어지는 매일이다.

새벽 네 시 반에 밖으로 나가도 이미 여명이 다가와 있고, 어둡지 않기에 그만큼 새벽잠도 줄었다는 기분이 드는 요즈음이다.

그러다 보니 새벽잠뿐 아니라, 저녁에도 밤 열 시 메일을 열어 보고 자려 하니 늦은 자리에 들게 되어, 새벽에 일어나는 일이 전에 보다 많이 힘들기도 하다.


어쨌거나 나이가 들면 잠도 줄어든다더니, 줄어든 잠잘 시간만큼, 설쳐 대는 시간이 늘어나게 되니, 보이는 일마다 간섭하게 되고, 그런 잔소리가 끊이지 않게 되니, 젊은이들한테 눈총을 받고 경원시당하는 일도 절로 생기게 되는 모양이다.


어제저녁.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올라오는데 3층을 들어서는 계단 부근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듣게 되었다.

그 소리가 어디서, 왜, 나는지를 퍼뜩 알아채게 되니 절로 짜증 나는 맘을 품으며 부지런히 그 장소를 찾아갔다.

짐작한 대로 세탁장 문은 열러 있고, 세탁장 안에 있는 건조기가 돌아가면서 내는 굉음이 소음의 주인공이었다.


제대로 작동시킨 세탁기가 돌아갈 때는 될수록 문을 닫아주어, 그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게 주의해야 하는 건데 그냥 팽개치고 가버렸기에 그 열린 문을 통해 소음이 짙어진 것이다.


어제도 그런 시끄러운 소음을 만나 화나는 생각을 참으며 일부러 찾아가 문을 닫아주었는데,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해야 하는 게 괘씸하고 짜증이 났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반복하는가 꼭 알고 싶어 진 마음에, 건조기를 열어 내용물을 살피기로 한다.

사관 백색 스즈끼 작업복 한 벌과 양말 두 켤레가 건조기를 돌아가게 만든 원흉이다.

누가 그들의 주인일까?를 확인하려고, 그 두 켤레의 양말을 각각 한 짝씩 걷어내어 방으로 가지고 올라왔다.

짝이 없어진 양말의 잃어버린 쪽은 꼭 찾아내어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누구나 노력할 것이란 생각이, 그런 유치한 방법을 쓰라고 부추겼던 모양이다.

물론 세탁장 문은 닫아주어 소리가 크게 새어 나가지 않게 해 놓고서 였다.

그리고 광고 문안을 작성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식당에 가져다 붙여 놓는다.


알 림

5월 28일 저녁 식사 후, 3층 세탁장에서, 사관 작업복 1벌과 양말 두 켤레를 세탁하신 후, 건조기를 작동시켜 빨래를 말리는 과정에 계셨던 분으로, 양말이 한 짝씩 없어지신 분은 본선 선장에게 알려주기 바랍니다.

왜 양말 한 짝이 없어져야 했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준 후, 양말은 다시 돌려드릴 것임.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되었는지를 알고 말할 수 있도록 생각하고 찾아오세요. 선장.


그러나 이런 알림을 보고 <그 물건은 바로 내 것이구나>로 알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손뼉 치며 찾아 올 사람은 없는 모양이다. 아니 아예 없을 것이란 생각을 미리 못하고 광고를 낸 내가 어쩌면 모자라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세상은 풍요로워져서(?) 그까짓 양말이나 옷은 낡아서 못쓰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포기하면 될 텐데 무엇하러 일부러 찾아가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어가며 수모(?)를 당하겠는가? 하는 게 요즘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의 추세라는 점을 전혀 짐작이나 감안 못한 내가 문제였던 게 아닐까?


붙였던 알림판 문안을 얼른 떼어내고 챙겼던 양말 짝도 다시 제자리로 돌려주며 혼자 쓴웃음을 짓고 일을 마무리 지어주었지만, 공동생활의 기본 예의를 망각하고 있는 그런 횅동에 대한 섭섭함은 그대로 내 마음 한 구석에 남아있다.

그것이 언젠가는 또 다른 형태의 훈계가 되어서 나타날 것이라는 예감을 마음 한구석에 품으면서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엄마 답장 바란다고 전해주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