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 연가를 요청받다

by 전희태
F6132(7716)1.jpg 유니막 패스를 벗어나며


 

위성 전화벨 소리가 내방 사무실까지 들려온다.

잠시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며 얼른 일어나서 통신실로 향하는데, 브리지에서도 계속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듣고 내려오려는 문의 여닫는 기척을 내더니 내가 움직이는 걸 알아채었는지 돌아가 버리는 기색이 감지된다. 


-여보세요.

수화기를 들어 응답을 하니,

-예, 안녕하세요?

하는 말이 나오는데 우리 배 담당 선단 장인 박 부장의 목소리이다.

-날씨는 좋습니까?

하는 의례적인 물음이 이어져 나온다.



현재 5 knots 정도의 속력으로 앞바람 앞 파도로 힘들게 가고 있던 중임을 이야기하다 보니 좌현 파이로트 래더가 파도에 휩쓸려 약간의 수리할 부분이 생겼음까지 알려주게 되었다.


그렇게 기상 정황에 대한 이야기로 몇 마디 더 이어지는데, 갑자기 이상한 음을 발하면서 통화가 끊긴다. 아직은 완전한 상태를 이루지 못한 위성 전화라 그런가 본론에 미처 듣지 못한 채 끊어진 수화기를 불퉁거리는 심정 되어 내려놓으며, 다시 벨이 울리기를 기다려주기로 한다.


잠시 후 벨이 울린다. 얼른 집어 응답하니, 

-좀 전 드리려던 말씀은 다름 아니라 이번에 입항하시면 연가로 하선하셨으면 해서요.

이번에는 급하게 본론부터 이야기한다.

-그래요?, 그럼 이번에 내리면 그만두어야 하는 건가요?

생각지도 못했던 하선 요청에 의아심을 품으며 묻는 말에

-아니죠, 선장님은 일 년 더 남아있으니까, DS호를 다시 타셔야죠.

하면서,

-실은 H 선장이 연가 후 2개월째 쉬고 있는데 마땅하게 갈 배도 없고 해서 선장님과 교대하려고 하는 겁니다. 하는 상황설명을 한다.

-그래요?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선선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었다.


연가 후부터는 릴리프(*주 1) 선장으로 근무하게 된다던, 중국 독킹 중에 박 부장이 출장 왔을 때 이야기하던, 것과는 또다시 달라져 계속 책임 선장으로 탈 수 있다는 언질인데, 그것도 괜찮은 이야기라 더 이상 묻지 않고 알았다며 연가 하선 조치에 동의해 주기로 한 것이다. 


사실 요새 같아서는 몇 달 푹 쉬고 다시 나오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심정이 자주 들었지만 이미 그렇게 하기에는 정년 때까지 나에게 남겨진 승선 가능한 기일이 너무나 짧아져 있는 형편이다. 

회사의 사정상 연가 하선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의가 들어왔으며 그에 따르면 추후의 재 승선도 회사의 배려를 받을 수 있으니 이 번 하선 조치를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요사이 생리적인 현상이랄까 하여간에 그런 내 몸의 컨디션 상태가 좀 저조한 분위기였던 것이 분명하여 많이 지친 것 같은 마음이었는데, 이 참에 내려서 연가로 좀 쉬고 재충전하여 다시 승선하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아 그대로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휴가로 집에 가게 되었다는 생각이 마치 소풍날을 받아 놓고 흥분한 설렘에 잠조차 설치던 초등학교 시절 같은 생기를 나에게 불어넣어주는 듯싶어 고소마저 짓는다.



얼마나 집이 그리워지면 그리할까? 손꼽아 날짜를 헤아리니 진짜 지난 1월 달에 집을 떠나온 후 그대로 10개월을 집에 못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다는 것이 그렇게도 좋은 것이란 걸 새삼 간수하며, 이번이 나의 마지막 연가가 되는 셈이니 지나간 세월의 연가 중에 궁리로만 해봤던 여러 가지의 일을 이번만큼은 실제로 저지르고 싶은 욕심이 다시금 꿈틀거린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라는 주제가 아직까지는 잡혀 있지 않지만, 치과와 병원에 가는 일을 하다 보면 또 그냥 지나치는 방향으로 되기가 쉽겠다는 추측도 은근히 떠오르고 있다.

요 며칠간 계속된 황천으로 인해 좀 저조해 있던 기분이 많이 나아지게 날씨도 제법 좋아지기 시작하고 있다.

유니막입구1.JPG 유니막 수로 입구

어쩌면 오랜만에 찾은 유니막 수로에서도 밤으로 예상되긴 하지만 새파란 하늘을 보며 지나가게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즐거운 예상도 해본다. 

아직도 한 번씩 선수루에는 안개를 피워 올리듯 파도가 선수에 부딪쳐서 만들어지는 흰 포말이 그려질 때마다 주춤대며 흔들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달리는 속력이 아침나절보다 많이 올라가고 있다. 


그렇다곤 하여도 이미 21일 입항은 물 건너간 일인 듯싶게 늦어지고 있다. 어찌 되었건 씩씩하게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이기에, 이제 입항하는 시기에 맞추어 배 안을 깨끗이 정리 정돈하려고 모든 실내 통로를 닦아내고 새롭게 왁스칠을 하는 등 그야말로 때 빼고 광내면서 환경정리도 시작하고 있는 거다.



그간의 황천으로 인해 선실 바깥에서 할 일들은 좀 남아 있지만, 실내 쪽 작업에 치중하다 보니, 독킹 중 느껴지던 어수선하고 지저분하던 주거 환경 쪽도 많이 정리되어 한결 훤해진 느낌을 준다.


문득 우리 집 마루와 방의 리노륨 장판의 때도 벗겨주고 왁스칠을 한번 해주면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서니 연가 중 한번 시도해 봐야겠지....


*주 1 릴리프 선장-연가로 하선하는 선장을 그 연가 기간을 대신 교대하여 승선근무 해주는 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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