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기만 잡으면,

조출을 기록했던 날

by 전희태
21.jpg 출항 전까지 마지막 트림밍 카고를 실으며

어제 오후에 부두에 접안하고 나서 1555시에 시작된 작업이 오늘 14시에 끝나면서 그대로 출항하는 시간 단축을 이루어 내니 접안 22시간 만에 출항하게 되었다.



이런 시간 단축이 가능할 수 있는 것은, 도선사가 화물 선적을 위한 서베이어 일까지 겸임하는 일관된 공정을 가지고 있는 이 항구 독특한 시스템 덕분으로 여겨진다.


즉 도선사로 승선하여 입항 지휘를 하면서도 부두에 도착하는 두 시간 가량의 시간 동안, 그는 본선에 실어야 할 화물량에 대한 결정 역시 일항사와 협의하고, 접안 작업이 끝나 본선을 떠나기 전에 선창 청소 상태까지도 체크하니 접안 즉시 선적작업이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형편에 부응할 수 있게 본선 컨디션이 되어 있지 못했던 지난번 이 항구 파커 포인트 부두에서 작업했을 때 같았으면, 이번 같이 접안 즉시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 오히려 낭패를 불렀을 것이다.


당시는 발라스트 펌프 한대가 고장이 나서 발라스트 배출에 시간이 걸릴 수 있었는데, 다행히 부두에 접안하고 나서도 부두 측 사정으로 한나절을 작업 없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동안 배출하여 무난히 선적시간을 맞출 수 있었던 행운(?)이 따랐던 거고, 그렇지 못했다면 늦어진 모든 책임을 본선이 져야 하는 일이 되는 게 아닌가.


어쨌든 이번 스물두 시간만의 출항은 본선으로 서도 기록적인 일이고, 나로서도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낮에 출항하는 편안함마저 얻게 되니 더욱 기분 좋은 조출(早出)이다.


단지 개인적으로 이곳에서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전화를, 입력시킨 카드 금액을 다 소진시키지 못하고 출항하게 되어 아까운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전화를 걸고 싶어 하면서도 형편이 안 되는 선원들에게 주어서 쓰도록 했으니 그 들로서는 공짜로 가족과 통화할 수 있는 작은 행운을 얻은 게 감사하다고 나중 나에게 인사를 하게 되니 그 또한 잘 된 일이 아닌가.


그렇게 전화를 걸게 해 준 후 생각지 못했던 현상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한국인 선원과 필리핀 선원들의 전화 거는 매너에 대한 현격한 차이를 알아내게 된 것이다.


전화를 집에 연결했을 때 한국 사람들은 될수록 짧게 통화하고 할 말만 하고 끊으려 하는데 비해 필리핀 선원은 통화가 시작되면 무슨 할 이야기가 갑자기 그렇게 생기는 건지, 언제 끊으려 하는 건지, 옆 사람은 갈피를 잡을 수 없이 늘어지게 통화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외지에서 그들과 함께 외출을 나간 한국 선원들이 집에 전화를 걸려고 공중전화기 앞에 설때 그들의 뒤에는 차례를 잡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한국 선원들 간에 전해지는 불문율로 되어 있단다.


이번 내가 빌려준 전화기는 물론 내 개인 전화기였지만 기왕에 빌려주는 것 여러 사람들에게 쓰게 해주려고 생각하였었는데, 처음 받아 든 필리핀 인 조타수는 계속 통화를 이어가고 있다. 다음 사람을 위해 좀 짧게 해달라는 눈치를 주면서 끝나도록 유도해야만 했다.


눈치 줘가며 다음 사람에게 사용하도록 해주었건만 그렇게 받아 든 친구 역시 전화가 걸리고 난 후에는 끊을 생각을 않고 온갖 시시콜콜한 가족 이야기를 하느라 바쁘다, 그러다 보니 이미 항구와 멀어지는 거리 때문에 전화의 송달 거리가 줄어, 아직 통화할 요금은 남았지만 더 이상 전화 통화를 할 수가 없는 형편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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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jpg 방금 작업이 끝난 8번창을 출항하기 위해 닫고 있는 모습


한편 출항 때도 파이로트가 드라프트 서베이어를 겸하고 있으니, 작업 끝날 무렵 먼저 와서 드라프트 서베이어로 일을 하면서 마지막 트리밍 화물량도 계산, 필요한 양을 더 싣도록 하면서 본선에게는 터그보트도 미리 잡도록 한 후 선적이 끝나자마자 그대로 계류삭을 걷어들이어 출항에 임하는 일을 하고 있다.

줄을 잡아주는 작업도 입항 때는 사람들이 일일이 걸어주는 것이지만 출항 때는 릴리즈 레버를 이용하여 그대로 줄을 내어주는 방법이니 그 또한 시간 단축에 유용하여 로더의 스파우트가 물러서기가 바쁘게 출항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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