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천 속에서 크로싱하는 배

황천 속의 마음 졸이기

by 전희태
JJS_51681.jpg 황천의 어수선함 속에서 15노트의 속력으로 움직여 우리 배의 앞을 가로질러가는 자동차 전용선.



단단히 각오하고서 태풍의 예상 진로 앞쪽에 먼저 도착 먼저 빠져나가려는 항행을 결행키로 한 밤이 되었다.

이 밤을 가장 바람이 세게 불고 파도도 제멋대로 달려드는 그야말로 태풍의 와중에 뛰어드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운 마음에 브리지와 방을 맴돌아 왔다 갔다 하는 동안 어느새 시간은 하루가 바뀌는 0시를 지나고 있다.

북서진 한다는 태풍이 그래서 조금씩 멀어지지만, 어제까지 불었던 여파에 팽개쳐 저 있는 선미에서는 파도와 바람이 들끓는 듯한 항해를 계속 강요하고 있다.

아무래도 태풍의 진로가 제일 궁금하면서 겁나는 일이라 하루 네 번 태풍의 움직임을 알려주는 일본 기상 팩스를 열심히 받아보고 있다.


우리의 기상과 항로를 이끌어주는 AWT에서의 예상보다 일본 기상청 예보가 태풍의 진로를 좀 더 북쪽으로 대만을 직통으로 치고 나가는 걸로 알려주고 있다.

현재 본선의 입장으로 보면 그런 태풍의 움직임이 AWT사의 예상보다 훨씬 바람직하고 유리한 형편이다.


우리 배 부근의 기상상황을 그런 일들에 비쳐보면 일본 기상 쪽이 훨씬 더 맞아 드는 거로 여겨진다. 우선 대만의 남쪽을 빠져나오면서 침로를 남서쪽인 236도 정도로 잡아서 움직이도록 했는데 밤이 되면서 바람 방향이 북동에서 북쪽으로 바뀌는 경향이 있어 우선 그에 맞추어 선수를 200도 방향으로 보침토록 지시했다.


이대로 내일 아침까지 내려가면 태풍의 중심에서 최근접 거리를 벗어나며 남하를 계속하는 셈이니 15호 태풍 장미의 가시에 찔리지 않고 항해를 완수하는 기쁨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밤에 더 이상의 바람이 달려들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며 태풍의 움직이는 속도 역시 조금이나마 늦어져서 우리를 먼저 내려 보내 지나가게 해 준 후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그렇게 되면 가항 반원인 태풍의 진행방향 좌측에 위치하게 되니 점점 멀어지며 바람도 그나마 좀 나은 곳을 지나가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는 거다.


아침이 되었지만 불어오는 바람과 해수 스프레이가 안개가 낀 날씨 같이 만들어 주고 있는 황천 속이다. 이미 어선들은 모두 철수한 바다 위에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배가 우리 배를 지나쳐 앞으로 나서고 있다. 속력 15노트의 자동차전용선이다.

레이더 상으론 벌써부터 접근을 알고 있었지만 육안으론 이만큼 가깝게 되어서야 눈 안에 들어선 것이다. 그간의 접근 상태로 봐서는 우리 배의 뒤쪽의 왼쪽에서 비스듬히 추월을 시작하여 선수를 지나쳐 오른쪽으로 빠져도 괜찮겠다는 판단이 들어 그 배의 조선 행위를 눈감아 준다.

그래도 우리 배 정선수를 빠져나가며 알짱거리고 있던 몇 분간은 조마조마한 마음에서 눈길을 끌 수가 없었다.

다시 태풍으로 관심을 돌리며 그 이름이 장미라고 했음을 기억해 낸다. 한글 이름임이 틀림없으니 우리나라나 북한에서 내어 놓은 이름이다.

향기와 꽃은 아름답지만 가시가 만만치 않은 꽃이 장미이다. 하지만 이번 우리와의 만남은 제발 가시가 없는 장미로 나타나 순항만이 계속되는 순조로움 속에 끝나지기를 간절히 비는 마음이다.


장미의 움직임이 늦어지고 방향도 좀 더 북쪽이나 북동쪽으로 움직여가기를 바라는 이 마음이 하늘에 닿아 지길 바라며 10시 40분에 나오는 기상 방송을 보니 아침 8시 현재의 태풍 진로는 북서진 9노트의 속력으로 움직인다.

그동안 12노트로 움직이고 있어 마음이 불편했는데 9노트로 되었으니 그나마 좀 도움이 되는 느낌이다.

움직이는 방향도 서북 서진하던 것인데 북서로 되었으니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되어 가는 기분이 들지만 만약 그대로 계속 간다면 대만이 다시 한번 더 정통으로 태풍을 맞아야 하는 상황이다.

좀 더 오른쪽으로 돌아 북진이나 북동진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면밀히 살펴본 기상도에는 우리가 필연코 지나야 하는 필리핀 서쪽 루존도 옆에 또 다른 1006 헥토파스칼의 저기압이 생겨있는 거로 나온다.

녀석도 시간이 가면 열대성 저기압으로 발달하여 결국 태풍으로 클 공산이 있는 모습이다. 그쪽에도 신경을 기울여주어야 할 모양이다. 빨리 대만을 벗어나서 녀석이 커지기 전에 그 모든 곳의 통과를 마쳐야겠다.


하루 종일 회색 빛이 감도는 바다와 하늘을 보며 지내온 마음에 저녁 어둠이 찾아오면서 아무래도 일기 시작한 파도가 좀 더 선체를 두드려주는 떨림까지 곁들이며 흔들어 주니 다시금 주눅이 든다.


거기에 귓속을 스쳐 지나는 바람소리까지 커진 것 같은 느낌이니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깥으로 보내는 시선 따라 마음속에 작은 불안감이 고개를 들어 응수한다.


거리상 아직 내일 오후까지는 태풍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크지 않은 기상상황인 줄은 알면서도, 지금의 환경이 마치 태풍이라도 가까이 와서 생기는 일 인양 지레 공포감을 조장하고 있다.


마음을 풀어 스스로 웃어보려 해보건만 작은 미소조차 지어지지 않는다. 태풍의 존재가 스며 있는 황천 속을 헤쳐나가야 하는 분위기의 어려움이 그렇게 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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