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를 맞아 떠 오른 옛일

성모님과의 첫 인연

by 전희태



090619_E7_0721.jpg <황천의 인도양에서 솟구치는 파도의 포말에 따라 쿵! 하는 대포 소리 같은 굉음이 선체를 흔든다.>






이제 슬슬 적도에 가까이 다가서면서 날씨도 점점 더워지기 시작한 6월도 어느새 끄트머리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오늘이 한국전쟁이 일어난 날이란 걸 깜박하니 잊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무심히 지나칠 뻔하다가 그래도 어찌 달력을 보면서 되새겨 내게 되었다.


나는 육이오 사변이라 칭하던 한국전쟁의 초반기 석 달 동안을 꼬박 서울에 머물면서 눈으로 지켜보고 몸으로 직접 겪으며 살아내었던 그 전쟁 마지막 증인이 되는 세대의 일인이다.


해마다 이날이 오면 묘하게도 잊지 않고 옛일을 떠 올리곤 하였는데, 오늘은 문득 그동안 정말 잊고 있었던 아주 특별한 일이 떠 오른다.


먹을 것을 제대로 구할 수 없는 적 치하에서 행여나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까 거리로 나가는 일은 학교 가는 일마저 빼앗겨 버리며, 허기진 배를 움켜잡아야 했던 어린아이들이 놀이를 겸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젊은 사람들이라면 눈에 뜨이는 대로 다 끌려가는 세상이니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별로 없지만 있어도 늙은이나 아이들뿐이었다.


그날도 나는 그렇게 내가 살던 신당동 언덕에서 동네 아이들과 같이 나섰었다. 그렇게 도달한 곳이 지금 와서 생각하면 명동 성당이 있던 큰 길가의 어느 상가쯤으로 기억된다. 그냥 발길 가는 대로 걸은 것이 한나절 걸려서 그곳에 당도했던 것이다.


이미 여러 번의 먹을 것을 찾는 사람들의 집 뒤짐을 당한 티가 풍기는 어수선한 분위기의 그곳을 지나치지 못하고 찾아 들어섰을 때 내 눈에 확 뜨이는 물건이 있었다.


아마도 먹을 것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함부로 쓰레기처럼 던져졌기에, 깨어지며 흩어졌을 그 물건은 하얀 석고를 틀에 찍어서 만들어 낸 하트 형의 작은 벽걸이 용 인물상이었다.


안면은 살색이 칠해진 채로 푸른빛 도는 머릿수건을 쓰고 입술은 빨간색이지만 가슴에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를 안고 있는 여인상이다. 당시 그 자리의 분위기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애처로운 모습으로 비치고 있든 모자상이었다.


돌아가는 눈길 따라 주위를 살피는데 똑같은 모양의 깨지지 않은 모자상이 한쪽 진열장에 여럿 포개어 있는 게 눈에 띄었다.


그때 그 순간 왜? 어떻게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등에 지고 있던 빈 가방을 벗어 내려서 그것들을 집어넣을 만큼 모두 거두어 넣은 후 다시 짊어졌다.


모두가 피난 가버린 주인 없는 집에 들어가 내 맘대로 물건을 취하는 행동은 분명 나쁜 일이지만 그 당시는 그걸 뭐라고 말릴 사람도 없었고, 너도 나도 가능하다면 눈에 뜨이는 모든 물건은 호기심 반 탐심 반으로 한 번쯤은 들어 보고 필요하면 그냥 취할 수 있던 무법천지가 지배하던 전쟁 중의 세월이었다.


그렇지만 한갓 석고로 만들어진 그 물건은 그야말로 입에 풀칠을 하기 위한 먹을거리를 찾아 집을 나섰던 내가 가져갈 만한 물건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져 이미 깨어져 조각이 난 여인과 아이를 보며 더 이상 나머지 것까지 깨어져선 안 되겠다는 순간적인 생각이 그런 행동을 한 것으로 밖에 추측 안 되는 상황이었다.


등짐으로 지워진 석고상이지만 이제 겨우 만 여덟 살을 반쯤 지나고 있든 초등학교 3학년짜리 어린아이가 짊어지기엔 만만치 않은 무게가 실려졌던 모양이다.


신당동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내내 어깨는 축 늘어지고 다리는 끌기가 귀찮을 정도로 아파왔지 만 그래도 꾹 참고 버티며 집에 도착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그 후 우리 집 벽면에는 똑같은 모양의 아기를 안은 여인상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거나, 혹은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 쳐다보면서 당연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 사물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다.


그때쯤 되어서야 아가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상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는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그냥 변함없이 꾸준하게 그렇게 동화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9.28 서울 수복이 된 후에도 그런 생활은 계속되었지만 전쟁은 새 변수로 막바지를 치닫게 한 51년도 초에 중공군이 인해전술을 앞세워 가며 압록강을 넘어오던 새로운 국면이 되었다.


다시 서울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에서 1.4 후퇴를 당하게 된 것이다. 전쟁 초기에 서울에 남아 있다가 고생을 한 우리 집안은 이번에는 집을 버리고 피난길로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어느새 손때도 묻고 칠도 좀 벗겨지며 볼품이 떨어진 성모자상이지만, 벽에 걸려있던 그대로 놔둔 채, 얼마 안 있어 돌아오리 란 기약을 다지며 겨우 몸 만을 거두어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피난길은 부산까지 이어져갔고, 그 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환도할 때까지 그냥 머무르는 곳이 되어버렸기에 기약했던 인연은 그것으로 끝나버렸다. 남아있던 성모자상이나 신당동 집과도 영원히 헤어지는 형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오늘 문득 그 당시를 떠 올리면서 석고로 된 성모자상이 우리 집에 기거했었던 인연은 필연적으로 우리 집안을 당신의 품 안으로 끌어 드리시려 작정하신 하느님의 간곡한 주재가 있었던 것으로 믿어지는 기분이 든다.


이제 한 사람의 천주교 신자가 되어 마치 신앙고백을 하는 기분을 가지고 신당동 집을 다시 떠 올려 본다.


그곳은 내가 성모님과 아드님을 전연 모르는 상황에서도 스스럼없이 그분을 받아들이어 모신, 어쩌면 내 마음속에 꼭 담아둬야 할 성지 같은 곳이 아닐까?


환도 이후 지금까지 계속 서울에 살았으면서도 다시는 찾아 가보지 못한 그곳 신당동과 내 생애 처음으로 다녀 본 학교인 청구초등학교를 이제라도 한 번쯤 은 찾아가 봐야 될 것 같은 생각을 하며 육이오의 기억에서 빠져나온다.


이제 싱가포르까지 한 열흘 정도 남은 항정이지만 그래도 이번 항차 전체로는 2/3는 온 것 같아 슬슬 기지개를 켜며 입항할 준비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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