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에서 만날뻔한 일

좁은 해역에서의 조선 상황

by 전희태
090708-C0_0011.jpg 본선 선수를 가로질러 가는 작은 탱커선의 모습



원래의 도착 예정은 5일이었으니 이미 들어왔다가 볼 일 다 본 후 떠나고도 남음이 있어야 할 싱가포르의 입항 시간이 그간 기상의 악화로 8일이 되어서야 도착하게 되었다.


기왕지사 늦어졌으니, 새로운 예정이 아무래도 신경이 더 쓰이는 새벽시간이라, 좀 더 늦추어 여명이 지나서 투묘지에 도착하기로 마음먹고 저속 전진의 속력으로 배정받은 투묘 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제 오전에 ONE FATHOM BANK를 통과하여 좀 편한 마음으로 그 후의 일정을 소화하며 하루를 지내고 이제 밤새워 달려서 싱가포르 항만당국이 지정해 준 AEBB 투묘지에 투묘하려고 접근하는 중이다.


물론 도선 강제 구역(주 1*)이 아니기에 자력 도선으로 접근하는 중인데 사실 싱가포르의 서쪽에서 동항의 침로를 가지고 접근하여 항로의 북쪽에 위치한 투묘 지를 찾아가야 하는 일은 우측통행을 강제하는 항로를 직각으로 거슬러나가야 하는 일이 들어 있게 마련이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새벽을 맞이 하니 피곤함과 함께 많이 떨어지는 집중력의 저하로 인해 거스르고 있는 항로상에 있는 선박의 흐름을 재빨리 꿰차며 빠져나가려는 행동을 하는데 많은 갈등을 겪게 만들고 있다.


유엔과 각국의 정부가 설정하는 선박이 밀집하는 길목에 만들어지는 항로 분리 제도는 우측 통항을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


싱가포르와 같이 접근하는 주항로가 항구의 남쪽 방향에 나있는 경우, 이 우측 통항이 강제인 분리 항로 상을 달리다 보면, 싱가포르에 기항하지 않고 통과하는 경우에는 그런대로 규칙에 따라 통항하면 되지만, 싱가포르 항구에 들어가려고 이 항로를 타고 달리다 빠져나오려면 신경 쓸 일이 적지 않다


. 그나마 동쪽에서 서항으로 가다가 싱가포르에 기항하려고 빠지는 경우는 그냥 오른쪽으로 돌려 들어가면서 그곳에 먼저 존재해 있던 배들에 조심하며 접근하면 되겠지만, 서쪽에서 다가오는 동항(EAST BOUND)으로 가던 배는 왼쪽으로 배를 돌려야 하므로 지금껏 자신과 반대편에서 잘 다니고 있는 타선박의 진로를 정면에서 막는 셈이니 충돌을 염두에 둔 많은 조심이 필요한 것이다.


090708-C0_0041.jpg <급유를 지원하기 위해 본선에 접안한 탱커선의 모습>



육상 도로에서 본인의 위험 부담을 감수시키며 좌회전이 허가되는 상항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이렇게 한풀 꺾인 자신의 책임하에 상대선의 양해를 얻어가며 실행하는 항구로의 접근에서, 어쩌면 세상 모두와 거스르며 일하려 하는 듯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핸디캡의 열세를 실감 안 할 수 없다.


이곳 통항을 관장하고 있는 TRAFFIC CENTER 인 CTIS에서도 지금 항로상을 통항하여 본선의 움직임과 관계가 깊은 배들의 정보를 알려주면서도 마지막 본선이 하는 행동에 대한 책임은 본선에 있다는 이야기를 어김없이 덧붙여주고 있다.


그러기에 조심스레 눈치를 봐가며 접근을 시작하였고, 이제 서항(WEST BOUND)으로 지나가는 배들은 모두 무사히 지나치도록 그들의 항로를 거의 직각으로 가로지르며 벗어난 후 싱가포르 내항의 지정받은 투묘 지를 찾아 들어가는 마지막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바로 그때 여명이 터 오기 시작하는 동녘 하늘이 붉어 오는 시간이 되는 걸 보며 문득 선박의 해난사고는 이런 시간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는 통계가 뜬금없이 머리에 떠 오른다.


사고란 나지 말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고가 나려면 예감이랄까 하여간 그냥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이상하게 느낄 수 있는 발상도 떠오르는 속성을 지녔다고 경험이 말해주기에 긴장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살폈다.


우리 배에게 투묘하도록 허가받은 AEBB 묘박지의 K 구역까지는 이제 1마일 정도 남아 있기에 과도한 기관 사용을 피하려고 선속을 최대로 낮추어 접근하는데 오른쪽 선수 45도 정도에 보이던 작은 배가 계속 가까워지는 형태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방금 전 우리의 오른쪽에서 있던 다른 배와는 통화하여 우리 배가 무사히 지나쳐 그 배가 우리 배의 뒤쪽을 통과하고 있는 상태인데, 이제 다시 앞에 나타난 작은 내항선과 이야기하여 서로의 의중을 타진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너무 급박해진 느낌이 든다.


우선 엔진부터 스톱시킨 후, 그 배와 어렵게 통화가 되어 서로의 오른쪽으로 통항하자고 했지만 그 배는 단호히 ‘노’라고 대답하며 그냥 밀고 들어온다.


이미 미리 편하게 피할 수 있는 시간은 놓친 기분이 든다. 서로 접근하는 시간을 최대로 벌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 배의 후진도 필요한 거로 판단하여 정지시켜서 타력으로 가던 상황에서 엔진을 FULL ASTERN! 시킨다.


엔진 후진이 걸리는 시간까지 조급증이 나는 마음을 다독이며, 지금 눈과 모든 신경은 우리 배의 선수를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그 배의 행동을 바라보는데 쏟아붇고 있다.


마침 카메라를 가지고 올라가 있었기에 얼른 집어 들어 그 배가 지나가고 있는 모습을 찍는다.


저 정도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며 지나가는 것은 VISIVILITY DIAGRAM에 의하면 지금 우리 배의 선수에서 150 미터 거리는 떨어진 상태라는 걸 생각해낸다.


그래서 무사히 지나갈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며 일순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눈은 그래도 그 배의 움직임에서 떼어낼 수 없어서 그대로 고정한 채 숨죽이며 보고 있다.


스멀스멀 움직이면서도 결국 그대로 우리 배의 선수를 오른쪽으로 들어서서 왼쪽으로 빠져나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한다. 한숨 돌리며 그 배의 꽁무니를 향해 퍼붓고 싶은 욕은 참기로 한다.


좁은 구역에서 만나게 되는 두 배의 가장 기본적인 피항 동작은 좌현 대 좌현으로 통항하는 우측 통항의 원칙을 위해 타를 오른쪽으로 돌려주는 게 기본인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냥 직진하려고 한 셈이다.


그런 나의 판단이 만약에 사고라도 나게 된 경우로 이어졌다면, 사고 발생의 책임에 대한 가장 잘못된 조선 협조 행동으로 지적될 사안이 될 확률이 높은 일이다. 게다가 그 가로질러간 선박도 싱가포르 국적선이니 불리한 상황은 계속 더해졌을 것이고....


이런 모든 만약에라는 가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시금 주위의 상황을 조심스레 살펴가며 지정 투묘지를 향한 접근을 재개하였다.


이윽고 -렛고 앵카!라는 내 명령에 따른, 촤르르! 앵카 체인이 풀려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한 항해 달성을 이룬 뿌듯함에 마음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다.


-자 모두들 수고했어!

당직 항해사와 조타수 모두에게 수고해준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선장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들도 내 인사에 답례를 하며 자신들의 다음 과업으로 다가간다.



주 1* 도선 강제 구역 : 선박이 입출항을 하는 과정에서 그 항구에 속해 있는 도선사를 꼭 사용하도록 관련법으로 지정하고 있는 구역.

거의 모든 항구는 도선사의 사용을 자국의 법으로 강제하고 있지만 싱가포르에서는 급유차 기항하는 선박의 급유지 단순 묘박의 경우 도선 강제를 하지 않고 도선 면제를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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